7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호텔 대형 회의실.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이 점퍼 차림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수십명의 한국 기자단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CEO 취임 후 100여일간 언론과의 접촉을 꺼려왔던 구 부회장의 스타일 탓이었다. 그러나 막상 취재진과 마주대하자 거침없이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의례적인 덕담을 생략한 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첫마디는 "LG전자는 제조업 경쟁력의 기본적 요소가 모두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구 부회장은 작심한 듯 LG전자 위기의 원인과 대책을 40여분간 털어놓았다. 결론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빠진 LG전자의 기업문화 DNA를 전면 개조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

구 부회장이 취임 후 가장 역점을 기울인 분야는 현장 방문이었다. 그는 "그동안 열심히 사업장을 돌아봤다. 국내 사업장,중국 톈진공장을 가봤고 여기 오는 길에 멕시코 공장 두 곳도 둘러보고 왔다"고 말했다. 현장을 돌아본 뒤 내린 결론은 '제조업 기본의 붕괴'였다. 연구 · 개발(R&D)은 시대변화에 뒤처지고,생산효율은 하락했다는 것이다. LG전자 제품이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은 이유라는 진단도 곁들였다. 그는 "앞으로 어떤 상황이 와도 지금보다 더 위협적이지는 않다"는 말로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상황이 심각한 만큼 극복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항공모함의 방향은 돛단배를 바꾸는 것처럼 빨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여러분이) 큰 회사 CEO가 한 사람 왔다고 하루 아침에 뭔가 고쳐질 것으로 기대했다면 이 자리에 잘못 온 것"이라고 말했다.

휴대폰 사업의 부진에 대해서는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패러다임이 바뀔 때 제대로 준비를 안했던 것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며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스마트폰 사업은 단순히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사업이 아니라 B2B(기업 간 거래) 성격이 강해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다.

스마트폰 경쟁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데다 이들 기업이 이미 세계적 통신사들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틈새 시장을 뚫는가 못 뚫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올해 1년 정도 고생하면 내년쯤 좋은 제품이 나올 것"이란 전망도 내놨다. 또 "독하게 개발하고 기본을 지키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기업문화 독하게 만들겠다"

구 부회장은 LG전자가 이런 상황에 내몰린 원인을 기업문화,근성의 붕괴에서 찾았다. "옛날 LG전자는 강하고 독하게 실행했는데 이 부분이 무너진 게 아쉽고 그것이 품질로 연결되더라"고 토로했다. 또 "속타는 일도 많다"고 덧붙였다.

전임 CEO가 치중했던 마케팅 전략 등도 에둘러 비판했다. "전임 CEO는 마케팅회사를 지향하면서 조직을 발전시킨 점이 분명히 있겠지만 나는 제조업의 기본인 R&D 생산 품질에 포커스를 두고 그것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리더십과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제조업은 강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만들려면 직원들에게 확실히 다가가는 슬로건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 부회장은 취임 후 LG전자의 슬로건으로 '패스트,스트롱,스마트'를 내놨다. 다른 회사보다 빨리 준비하고,강하게 실행하고,효율성 높게 일하자는 뜻이다.

이어 "독한 문화를 LG만의 DNA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강하고 독한 회사로 만들어 놓는 것이 위기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자신이 갖고 있는 '결정구'라는 얘기였다. 이를 통해 "몇 년간 DNA를 잘 만들어 CEO가 바뀌어도 절대로 회사의 근간이 흐트러지지 않는 기업을 만들겠다"고도 했다.

신규 사업에 대해서는 10여개 부문에 대해 거침없는 설명을 마친 후 "내 머리에 있는 것은 하루 종일 얘기해도 다 못한다"며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전자제품용 필름,전기자동차용 에어컨 시스템,수처리 사업,태양광 사업 등과 함께 조명사업에 대해서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LG가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는 플라즈마 라이팅시스템 사업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야구의 경영학

LG트윈스 구단주이기도 한 구 부회장은 야구 얘기를 섞어가며 경영철학을 밝히기도 했다. 인재 확보와 관련해 그는 "LG트윈스 2군이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2군 선수들에게 자유계약 선수 영입은 없다고 했더니 눈에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외부 영입이 없으면 자신이 1군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더욱 열심히 야구를 한다는 얘기였다. 전임 CEO가 외국인을 회사의 주요 보직에 영입한 정책의 문제점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 직원들에게 비전을 주겠다고 하면서 외부에서 데려오면 어떻게 생각하겠냐"며 "적어도 2,3년간 외부영입은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성과보상 시스템을 확실히 만들겠다는 것도 야구에 빗대어 설명했다. "이병규 선수는 2000만~3000만원의 연봉을 받았었지만 새로운 보상시스템에 의해 1억원을 받게 됐다. 이 친구가 전지훈련에서 5할8푼을 쳐서 수위타자를 차지했다"고 강조했다. 이런 발전은 성과보상 시스템에 따른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향후 보상시스템을 획기적으로 손질해 LG전자 직원들이 자신의 일을 더욱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다.

라스베이거스=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