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유배지였던 남해안 도서지역은 향학열이 높기로 유명하다. 그곳에는 사대부 지식인들이 대부분 사연 많은 귀양으로 정착했기 때문에 중앙으로 다시 진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2세의 과거급제를 위해 교육에 힘을 썼다. 그래서 전통처럼 내려온 교육열로 지금도 그 지역은 대대로 박사가 많다. 출세의 방편으로 지식인을 많이 배출한 것이다.

남쪽지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식인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지식이 많을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지식이 많으면 행복할 가능성도 많은가. 지식이 많으면 그에 대한 이러저런 반대급부가 따르니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과 행복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로는 오히려 그 지식 때문에 불행할 수도 있다.

미국의 한 대학교수는 명문대 출신의 수재들이 대부분 교도소에 있다는 것에 대해 한탄스럽다고 했다.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그 지식을 위법한 방법으로 재물 모으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이다. 사회가 행복하기 위해선 지식인도 필요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더 많아야 한다. 더불어 사는 지혜 말이다.

두 사람이 한조가 되어 각자 자기 몸의 피곤한 부위가 있으면 서로 상대방의 그 부위를 마사지 해 주도록 하는 실험을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피곤한 부분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과 서로 공명(共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신보다 옆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지혜다.

한 농부가 어느 해 올 겨울은 추위가 그리 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 기자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 농부는 무의 뿌리가 그리 깊게 박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는 날씨가 추우면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 올해 무의 뿌리는 깊지 않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은 농부의 말대로 예전보다 춥지 않았었다. 이것은 지식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경험에서 오는 농부의 지혜인 것이다.

언젠가 검사출신의 지인 변호사에게 친구를 조심하라고 일러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은 절대 그런 친구가 아니라며 변호를 하더니 최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친구에게 큰 돈을 사기 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식이 많다고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며, 때로는 지혜가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융통성이 없는 지식은 지혜가 아니며 악의적인 지혜는 단순함만 못한 결과를 낼 수가 있다.

몇 년 전 신문에 녹즙기에서 쇳가루가 나온다는 광고가 실린 적이 있었다. 경쟁업체가 상대회사를 비방할 목적으로 광고를 한 것이다. 경쟁회사를 누르고 시장을 장악할 목적으로 시작한 비방광고 때문에 소비자는 녹즙기 자체에 대해 불신을 하게 되었고, 결국 두 녹즙기 업체 모두 망하고 말았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만 영업 전략을 짰지, 정작 자신도 함께 무너질 수 도 있다는 생각은 못한 것이다. 함께 공생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못한 바보 같은 지혜인 것이다.

탈무드는 인간이 가장 빈곤한 것은 배가 고팠을 때가 아니라 지혜가 없을 때라고 했다. 지식은 배우면 되지만 지혜는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며 경험과 사고(思考)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식에 너무 욕심을 부리면 지혜가 빈곤해지고, 지혜가 없는 사람은 귀중한 인생을 낭비할 수 있다.

지식이 모방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 모으는 것이라면 지혜는 때로는 비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으니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가슴에서 울리는 지혜를 받들길 바란다. (hooam.com/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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