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두번의 개국을 했다. 1867년 메이지(明治) 유신이 첫번째다.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을 폐기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근대화의 첫발이었다. 두 번째 개국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국가 시스템을 개조한 것이다. 군국주의와 군수산업을 포기하고 민주주의와 민수 산업화를 추진했다. 제2 개국 후 일본은 40여년간 고도성장을 달성해 미국에 이은 2대 경제대국으로 컸다.

일본은 지금 또 한번의 개국을 준비 중이다. 간 나오토 총리는 올 신년사에서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메이지의 개국,국제사회에 복귀한 전후(戰後) 개국에 이어 올해 '헤이세이(平成 · 현재 연호) 개국'을 이룰 것"이라며 '제3 개국론'의 기치를 올렸다. 일본 경제계를 대변하는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신년호부터 '세 번째 기적'이란 기획물을 1면에 내며 제3 개국을 주창했다. '나라를 열어, 길을 개척하자'는 사설을 시리즈로 싣기도 했다.

'지금 같은 글로벌 시대에 웬 개국?'이랄 수 있다. 하지만 위기에 봉착한 일본의 현실을 보면 이해가 간다. 2011년을 맞으며 일본인들이 느끼는 절망과 불안은 상상 이상이다. 일본은 지난해 경제 규모에서 중국에 추월 당했다. 더 이상 세계 2위 경제대국이 아니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 · 군사 면에서도 세계는 'G2(미국과 중국)'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일본 경제는 지난 20년간 명목 성장률이 연평균 0.5%에 그쳤다.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잃어 버린 20년'간 고령화 저출산 인구감소는 동시 진행됐다. 이때 늘어난 건 재정적자와 정부 부채뿐이다.

일본의 전후 베이비부머인 단카이(團塊)세대는 내년부터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65세가 된다. 단카이 세대는 664만명으로 총인구의 5%를 차지한다. 앞으로 1~2년 안에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급증하는 사회보장지출에 일본 재정은 파탄 날 수 있다. 지금 특단의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박감의 표현이 '제3 개국'이다.

일본이 구상하고 있는 개국의 핵심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FTA라는 대외 개방으로 과감한 내부 혁신을 추진하겠다는 복안이다. 일본은 지름길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선택했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칠레 페루 싱가포르 등 9개 회원국이 참가하는 TPP는 2015년까지 회원국 간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철폐한다는 목표다. 일본은 여기에 참여해 그동안 부진했던 양자 간 FTA를 단번에 만회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본이 TPP에 집착하는 데는 FTA에서 앞서 나간 한국이 큰 자극제가 됐다. 일본의 한 경제관료는 "FTA 추진의 벤치마킹 대상은 한국"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미국 유럽연합 등과 잇따라 FTA협상을 타결하는 모습을 보며 좌절했다. 일본은 국내총생산(GDP)의 1.5%밖에 안되는 농업에 발목이 잡혀 FTA는 말도 못 꺼냈다. 반면 한국은 FTA를 속속 체결해 기업들이 세계로 뻗어 나갔다. " 한국의 약진에 일본이 정신을 차렸다는 얘기다.

일본을 보면 '가세가 기우는 부잣집'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저력을 무시해선 안된다. 작년 초 한국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에 자극 받아 민 · 관이 총력전을 펼치며 터키 원전 수주 등에서 한국에 앞서 나가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제3 개국론까지 들고 나오며 비장하게 새해를 시작한 일본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한 · 미 FTA 국회 비준 등 우리가 갈 길에는 더욱 박차를 가하면서….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