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부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A씨(55).20여년간 땀흘려 모은 돈으로 경기 분당에 대형 아파트 한 채를 사둔 까닭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노후 걱정은 안해도 되는 것 아니냐"며 부러움을 받는다. 하지만 A씨는 '남의 속도 모르는 소리'가 야속하기만 하다.

A씨가 보유한 자산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80%.대학생인 두 자녀의 결혼자금으로 들어놓은 적금을 제외하면 금융 자산이라곤 전무한 수준이다. 아파트 한 채 깔고 앉아있다 보니 현금 흐름도 꽉 막힌 상태.연금을 받으려면 아직 5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돈 나올 구멍은 없는데 속 모르는 친구들이 해외여행이라도 가자고 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렇다고 '마지막 보루'인 아파트를 팔 용기는 나지 않는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낳은 한국 중산층의 은퇴 후 모습이다. A씨처럼 당장 쓸 돈이 부족할 뿐 아니라 만에 하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 노후생활 자체가 흔들릴 위험에 노출돼 있다.
[H2O 행복하고 건강한 노후] (1) 부동산 不敗 신화 믿다간 노후인생 必敗
◆집 한채로 노후 대비?

국가별로 살펴보면 한국 가계의 부동산 의존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작년 9월 내놓은 '주요국 가계금융자산 비교'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기준으로 한국 가계의 부동산 등 비금융자산 비율은 79.6%였다. 미국(35.1%) 영국(54.8%) 일본(41.3%)에 비해 훨씬 높았다. 지난 50여년간의 압축적 성장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속도로 상승한 역사적 배경 탓이다.

이에 반해 미국은 가계자산에서 금융자산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2005년 60.5%였던 금융자산 비중이 작년에는 65% 수준으로 높아졌다. 영국과 일본도 45~60% 수준의 금융자산 비중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분산투자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이소영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부동산 등의 실물자산에 편중된 우리나라 가계자산 구조는 부동산 시장의 불확실성과 인구 고령화라는 두 가지 위험 요소에 과도하게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엔 부동산 가격이 꾸준히 상승해 안정적으로 자산을 늘릴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저출산 현상 등으로 부동산 수요가 점차 감소해 '부동산 불패 신화'는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그는 "부동산만 보유하고 있는 은퇴자는 이런 리스크를 한몸에 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금융자산도 현금 · 예금 편중

20%에 불과한 한국 가계의 금융자산도 그나마 대부분 현금과 예금으로 구성돼 있다. 금융자산의 절대적인 규모가 작다 보니 노부모나 자녀에게 '급전'이 들어갈 일에 대비해 현금을 확보해놔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8~2009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금융자산에서 현금과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42%에서 지난해 2분기 46%로 높아졌다. 노인들이 막대한 현금을 장롱 속에 숨겨놓은 채 소비에 나서지 않아 저성장의 늪에 빠져버린 일본을 닮아가는 모양새다. 작년 2분기 일본 가계가 보유한 금융자산 중 현금 ·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55.8%였다.

반면 미국의 경우 금융자산에서 현금과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4.7%에 불과했다. 채권 주식 펀드 등 금융투자상품에 투자한 돈이 52%로 고위험 · 고수익의 적극적인 투자성향을 그대로 드러냈다. 영국의 경우 선진화된 사회보장제도와 노후를 대비한 가계의 자산 운용 성향을 반영해 보험 · 연금 비중이 금융자산의 54.4%에 달했다.

◆은퇴 후 균형 자산,미리 준비해야

한국에서도 나이가 젊을수록 금융자산 비중이 높고 금융자산 중에서도 현금이나 예금 대신 투자상품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건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통계청의 '2010 가계금융조사'에 따르면 40대의 가계자산 중 금융자산 비중은 25.8%로 60세 이상 13.0%에 비해 두 배가량 높았다.

한국경제신문이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와 함께 삼성생명 FP센터 고객 3081명의 자산 포트폴리오를 조사한 자료에서도 40대 사무직의 경우 펀드 · 신탁 · 파생상품,주식,채권 등 투자금융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4.1%로 50대의 3.5%에 비해 다소 높아지는 추세를 보였다.

강원경 하나은행 압구정골드클럽 센터장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부동산과 현금성 금융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지고 있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과도하게 편중돼 있는 게 사실"이라며 "부동산 자산의 비중을 낮추고 연금 · 보험 등으로 현금흐름을 확보해야 은퇴 후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부동산을 노후생활비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부동산 규모를 줄이거나 교외로 이동하는 방법,실버타운이나 요양시설로 옮기는 방법,역모기지 등의 방법을 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유창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