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입니다. 석유화학 시설이 정전으로 20분 이상 가동이 중단되면 복구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인데 이렇게…."

17일 오후 10시 전남 여수산업단지 내 GS칼텍스 공장에서 만난 강송구 생산지원 공장장은 이번 정전사태를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강 공장장은 "시설 가동이 20여분간 중단되면 관 속을 통과하는 석유화학 제품과 재료가 완전히 굳어버려 공장을 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무리하게 가동했다간 폭발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GS칼텍스는 여수산업단지에 있는 업체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제1공장 가동은 완전 중단됐고 제2공장은 부분 피해를 입었다. 회사 측은 300여명의 인력을 투입,밤샘 복구작업을 벌였다. 전기기술자인 이용길 계전1팀장은 "전기는 살렸지만 관에 낀 화학제품을 서서히 가열해 녹이려면 최소 5일,최대 1주일까지 걸린다"고 말했다.

◆20여개 대형 업체 가동 완전 중단

이상한파로 인한 겨울철 전력대란 우려가 현실이 됐다. 입주 업체들은 이날 정전사고가 지난 3,4년 새 최대 규모이며 피해액도 1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 화학산업단지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화학단지의 가동이 사실상 멈추면서 '산업의 쌀'로 불리는 석유화학 원료 수급은 물론 수출 차질 등 연쇄 피해가 불가피해졌다. 정부의 전력 수요 관리 체계에 구멍이 뚫리면서 기업들은 혹시 모를 정전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이날 여수 산업단지 정전사고는 오후 4시8분부터 4시31분까지 23분간 발생했다. 정확한 사고 원인을 놓고 전력 공급자인 한국전력과 입주 업체 간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여수 산업단지의 한 입주 업체 관계자는 "여수화력발전소에서 변전소로 이어지는 전선로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변압기 폭발 사고가 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정전 피해로 공장 가동을 멈춘 기업은 268개 입주 업체 중 20여개다. GS칼텍스 여천NCC LG화학 호남석유화학 등 대형 업체들의 정전으로 인한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전망이다. 소규모 변전소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주요 전력 공급 루트 중 한 곳이 끊겼기 때문이다.

◆피해업체 더 늘어날 듯

정전사고로 인한 피해 규모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다. 여수 산업단지 입주 기업들의 연간 생산총액(작년 말 기준)은 37조8438억원,수출은 130억5500만달러에 이른다. 단순 계산으로도 하루 생산을 못하면 약 1051억원의 손실을 보게 된다.

여수 산업단지에서는 2006년 세 차례 정전 사고가 나 수백억원의 피해가 발생하는 등 평균 2년에 한번꼴로 정전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2008년 5월에는 한화케미칼 여천NCC 대림산업 LG화학 GS칼텍스 등 5개 업체에 전력 공급이 2초가량 중단되는 사고가 발생,200억원 가까운 피해가 났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상황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이번에 피해를 본 업체 수와 2008년 정전 사고 피해 규모를 감안할 때 전체 피해액은 1000억원을 훌쩍 넘을 것"이라며 "고유가 상황과 맞물려 국제 석유제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모든 업체가 100% 가동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피해 규모가 더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장 가동이 멈춘 대형 업체뿐만 아니라 이들로부터 원료를 공급받는 산업단지 배후의 1181개 협력업체들의 피해까지 합하면 피해액은 급증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플라스틱 합성수지의 원료인 에틸렌을 생산하는 여천NCC는 여수 산업단지 전역에 깔린 파이프를 통해 중소 화학업체에 에틸렌을 공급하고 있다.
GS칼텍스 한화케미칼 LG화학 등 대부분 업체들은 18일 오전 정상 가동을 목표로 복구 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강추위로 인한 설비 재가열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정상 가동까지 소요되는 기간이 2~3일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전사고 책임 공방 뜨거울 듯

정전사태를 둘러싼 책임 공방과 피해 배상 문제를 놓고도 논란이 일 전망이다. 사고 원인을 놓고 한전과 입주 업체 간 의견이 달라서다. 한전 측은 전력선 복선화를 통해 한쪽 선로가 정전되더라도 나머지 선로를 통해 전력이 정상 공급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업체들은 발전소에서 산업단지로 이어지는 전선계통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고 맞서고 있다.

업체들은 사고 원인이 한전 측의 과실로 밝혀지더라도 피해 배상을 받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력공급권을 가진 한전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과거 몇 차례 정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입주 업체들은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공문만 한전 측에 전달했을 뿐 실제 배상을 받거나 법원에 정식 소송을 제기한 전례는 없었다. 유화 업계 관계자는 "모든 전력을 독점 공급하고 있는 한전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여수=최성국/이정호/이태명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