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시인(55)은 과거 자신의 시에서 특정 구절이나 이미지를 골라내 새로운 상상력을 출발시켰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유롭고 재미있다.

20년간 독일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며 시를 써온 허수경 시인(47)은 모국어와 다소 거리를 둔 채 외국어와 고대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국어를 새롭게 발견한다. 낯선 환경에서도 국어는 '스스로 변형하고 운동하는' 유기체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두 시인이 출판사 문학동네가 시작한 '문학동네 시인선'의 선두주자로 나서 각각 시집 《아메바》와 《빌어먹을,차가운 심장》을 내놨다. 책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는 통상적인 시집과 함께 판형을 가로로 돌려 책장을 위로 넘기는 특별판을 동시에 출간했다.

새로운 형식에 끊임없이 도전해온 최승호 시인이지만 이번 시집은 더 색다르다고 말했다.

"그동안 쓴 시들을 다시 전부 읽어보며 분류하는 작업을 할 기회를 가졌는데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어요. 시를 하나의 의미로 완결시키려 할 때 상상력을 펼치는 데 한계가 생기거든요. 다른 형식을 시도하면 내용도 달라지지 않을까 했죠."

시집 《아메바》는 과거 시구를 윗 페이지에,여기에서 파생된 새로운 시들을 아래 쪽에 배치하는 식으로 구성됐다.

'05 유령들은 잠들지 않는다. 육신이 없으면 잠도 잘 수가 없다. 영원한 불면증.'

'05-1 닭머리들이 나와서 사료를 쪼아대는 밤이다/ 불면의 닭눈들을/ 백열전구들이 밝혀놓는 밤이다/ 달걀을 낳자,달걀을 낳자/ 걀걀걀 걀걀걀/ 오,불면으로 살찐 어머니 닭이여!'

'05-2 스물네 시간 불 밝힌 편의점에서/ 늦은 밤 펭귄 같은 학원생들이/ 컵라면 국물을 들이켠다/ 훌쩍! 훌쩍!/ 피 흘리며 싸우는 수탉들의/ 볏이/ 로마군단의 투구처럼 빨갛다. '('유령들'전문)

이 시의 첫 번째 버전인 '05'는 최 시인이 1996년 《눈사람》이란 시집에서 발표한 시 '편의점의 불빛'에서 가져온 것이다. 최 시인은 "통일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상상력의 촉수들이 제멋대로 튀어가고 날아가도록 했다"며 "과거의 시와 시작(詩作)을 빛나는 쟁기로 갈아 엎고 스펙트럼을 넓히는 실험적인 작업이었다"고 덧붙였다.

1992년 독일로 떠나 뮌스터대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며 시작을 병행해 온 허수경 시인은 6년 만의 신작 《빌어먹을,차가운 심장》에서 보다 다양한 산문시의 매력을 선보인다.

시도 에세이도 아닌 글,희곡 형식을 빌려 쓴 시 등 자유롭게 산문시의 형태를 시험했다. '카라큘량의 에세이'는 일반적인 시집 형태로는 무려 13쪽에 달한다. 강한 서사성에도 불구하고 때론 따뜻하고 때론 섬뜩한 서정이 잘 녹아있다.

'나는 그렇게 있다 너의 눈 속에/ 꽃이여,네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너를 바라보던 내 눈 속에/ 너는 있다/ 다람쥐여,연인이여 네가 바삐 겨울 양식을 위하여 도심의 찻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때/ 바라보던 네 눈 안에 경악하던 내 눈 안에/ 너는 있다. '('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일부)

허 시인은 "시가 훨씬 수다스러워졌는데 새로운 형태의 시집인 특별판이 (작품을)수렁에서 건져준 것 같다"며 "문학시장에서 시가 더 이상 팔릴 수 없는 상품으로 치부되는 현실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인간들의 길(삶)을 적어놓고 재건하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해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송재학 시인은 문학동네 시인선 세 번째 주자로 나서 죽음을 주제로 한 《내간체(內簡體)를 얻다》를 함께 출간했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올해 중견과 신인 시인들을 절반씩 섞어 최대 30권의 시집을 펴낼 예정이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