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기간에 보잉기 200대를 비롯한 450억달러어치의 미국 물건을 사기로 계약했다. 이달 초 스페인 독일 영국 등 유럽 3개국을 순방한 리커창 부총리도 각 나라에서 수십억달러 규모의 구매계약서에 서명했다. 중국 외교의 상징이 '핑퐁외교'에서 '쇼핑외교'로 전환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쇼핑외교의 위력은 대단하다. 중국의 통큰 구매로 23만5000여명의 일자리가 미국 내에서 새로 만들어질 것이라며 미국 측은 반색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제조업에서 늘어난 일자리 13만6000개의 2배 가까이 되는 수준이다. 일각에선 '보잉기 200대'에 밀려 인권 환율 등 미국의 근원적 가치와 직접적 이해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가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돈으로 상대를 제압하는'쇼핑외교'

쇼핑외교가 본격화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뒤부터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인권 문제를 공격하고,달라이 라마를 불러들이자 중국은 프랑스를 '왕따'시켰다.
금융위기로 곤란을 겪고 있는 독일 등 유럽 각국에 계속 '구매단'을 보내 수백억달러어치 물건을 사면서 프랑스만 제외시켰다. 결국 프랑스는 "티베트의 독립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야 했다.

사르코지는 이에 앞서 2007년 말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중국의 대만 정책을 지지한다"고도 말했다. 귀국길,그의 손에는 120억달러어치 프랑스 제품 판매 계약서가 들려 있었다.

쇼핑외교는 특별한 이슈만을 찾아다니는 건 아니다.

리 부총리는 올초 유럽 3개국 방문길에서 스페인 75억달러,독일 87억달러,영국 40억달러어치 물건을 사기로 했다. 베이징의 한 외교전문가는 "돈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쇼핑외교의 실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GE, 전동차 합작사 설립

미국 백악관이 지난 19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 정부가 맺은 450억달러의 패키지 수출계약에는 미국의 대표 상품이 모두 포함돼 있다.

보잉사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에 걸쳐 총 190억달러 상당의 737 · 777 모델 여객기 200대를 수출하기로 중국 측과 계약을 맺었다. 유럽의 에어버스와 경쟁하고 있는 보잉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게 된 것에 고무된 표정이다.

부품 및 하청업체들을 포함해 1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반기고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은 중국의 고속열차 기술을 이전받기로 했다. 또 GE는 중국 최대 철도회사인 CRS와 손잡고 미국 내에 고 · 중속 전동차량을 제조하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커민스는 중국의 버스 회사인 정저우위퉁과 중국 시장에 공급할 하이브리드 파워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캐터필러는 채광 및 건설장비,디젤 및 가스 터빈 엔진을 중국에 수출하기로 했다. "10%대에 육박하는 실업률에 시달리는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23만5000여개의 일자리를 만들 이번 패키지 수출계약이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베이징의 한 외교전문가는 말했다.

◆미,위안화 SDR 편입 지지

미국이 이번 회담에서 중국으로부터 지식재산권 보호와 조달시장 개방 등의 약속을 받아낸 것도 성과로 꼽힌다. 중국은 정부의 모든 기관이 합법적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도록 감독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 또 외국 기업의 정부 구매 시장 참여를 막는 '자주혁신 정책'도 고치기로 했다.

중국은 위안화를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 바스켓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에 대해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중국이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국제화 행보가 탄력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SDR 바스켓 통화는 달러 유로 파운드 엔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미국이 450억달러의 차이나머니에 밀려 중국의 인권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지 못하고,위안화 절상까지 적극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천퉁밍 홍콩 현대중국연구소 연구원은 "비록 지식재산권 보호 강화와 같은 합의가 있긴 했지만 민감한 문제인 인권 등에 대해선 미국이 생각보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며 "중국의 쇼핑외교 위력이 새삼 돋보인 정상회담이었다"고 평가했다.

베이징=조주현 특파원/김태완 기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