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을 두고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에 빗댄 '오후동주'란 말이 유행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 주석이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이다.

오월동주의 원래 의미는 평소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라도 이해관계가 생기면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구천(句踐)은 소강(少康)의 배다른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와신상담(臥薪嘗膽)했다. 오,월 두 나라는 초나라의 동맹국으로 사이좋게 지내다가 패권욕에 사로잡히면서 갈라섰다. 월나라에 비해 힘이 월등한 오나라는 초나라와 빈번한 전쟁을 치렀다. 이때 월나라가 초나라에 붙자 오나라로서는 눈엣가시였다.

먼저 월나라를 공격한 자는 오왕 합려(闔閭)였다. 그는 구천의 아버지 윤상(允常)이 세상을 떠나자 상사를 이용해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하자 월왕 구천은 사형수들을 거느리고 열을 지어 오나라 군대 진영 앞에서 자살하게 하는 공격법을 선택해 기겁하는 오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이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죽게 된 오왕 합려는 "월나라를 절대 잊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아들 부차(夫差)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부차는 유언을 받들어 오자서(伍子胥)와 백비를 임용하고 섶 위에서 잠을 자며 월나라에 복수하고자 했다.

월왕 구천 역시 초나라 출신 문종(文種)과 범려를 등용해 정치를 개혁하고 국력을 길렀다.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기원전 494년 봄,섣불리 오나라를 공격했다가 대패해 병사 5000명만 데리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도주하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치욕을 겪는다. 구천은 또 미녀들과 재물을 백비에게 보내 속국이 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

몇 년 후 범려가 월나라로 돌아왔고,회계산의 치욕을 겪은 지 7년이 되자 구천은 다시 오왕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대부 봉동(逢同)의 만류로 공격을 단념한다. 2년 뒤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공격당해 애릉에서 패배했다. 구천은 부차에게 식량을 빌려 달라고 하는 등 스스로를 낮추고 오왕을 섬기며,백비와 오자서를 이간하는 계책을 병행하면서 어둠 속에서 자신을 기르고 있었다.

구천은 먼저 상처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전쟁에서 죽은 유족들을 보살폈다. 그는 쓰디쓴 쓸개를 걸어놓고 밥 먹을 때도 그것을 맛보면서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가 택한 위민정책은 이러했다. 여자가 임신해 관청에 보고하면 의사를 파견하고,사내아이를 낳으면 술 두 병과 개 한 마리를 상으로 내렸다. 여자아이를 낳으면 술 두 병과 새끼 돼지를 주었다. 세 쌍둥이를 낳으면 유모,두 쌍둥이를 낳으면 양식을 덧붙여줬다. 내정을 개혁하고 형벌과 부세를 줄이고 백성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독려하자 10년 만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게 됐고 집집마다 3년 동안의 양식을 비축했다.

월나라의 이런 대비와 달리 부차는 자만에 빠져 지냈다. 백비와의 갈등 속에서 충신 오자서는 "내 눈을 오나라 동쪽 문에 매달아 놓아 월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저주를 퍼부으며 자살한다. 구천은 모사 범려의 계책에 귀기울이고 기회를 엿보다 공격,3년의 공방전 끝에 고소산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부차를 자결하게 만들고 태재 백비도 주살한다.

22년 만에 구천은 오나라를 평정하고 제나라와 회맹,초나라 송나라 노나라와의 우호관계도 구축하면서 패왕(覇王)이란 명망을 얻으며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야말로 '상담(嘗膽)'이 '와신(臥薪)'을 이긴 것이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