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으로 인한 초단위 오차를 이겨낸 기계식 시계,전세계 37개국의 시간대를 한눈에 보여주는 시계,부가티 자동차를 형상화한 시계’

해가 바뀌면 전 세계 시계 마니아들의 눈과 귀는 스위스 제네바로 쏠린다.최고급 시계 메이커들이 지난 1년간 공들인 ‘작품’을 쏟아내는 국제고급시계박람회(SIHH)가 매년 1월 중순에 열리기 때문이다.리치몬트그룹이 이끄는 SIHH는 라이벌 스와치그룹이 주도하는 ‘바젤월드’(3월)와 함께 양대 시계박람회로 꼽히는 시계업계의 ‘메이저리그’ 무대다.

지난 17일부터 19일(현지시간)까지 열린 제 21회 박람회에도 리치몬트 산하 까르띠에 바쉐론콘스탄틴 예거르쿨트르 몽블랑 IWC 보메&메르시에 피아제 반클리프아펠 등 19개 브랜드들이 ‘신무기’를 들고 나왔다.이 중엔 독립 시계업체인 파르미지아니 오데마피게 등도 포함됐다.박람회장은 명품시계를 사들이기 위해 전세계에서 달려온 딜러들로 사흘 내내 북적였다.한 개에 수백만원에서부터 수십억원에 달하는 이들 제품은 박람회가 끝난 뒤 순차적으로 한국으로 공수돼 국내 시계 마니아들의 선택을 기다리게 된다.

◆불가능에 도전하다

중력으로 인해 매일 4초 정도 오차가 생기는 것은 기계식 시계(태엽을 감거나 손목에 차는 것으로 동력을 얻는 시계)의 숙명이었다.여기에 도전장을 낸 인물은 스위스의 천재적인 시계메이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였다.1801년 브레게가 개발한 투르비옹 덕분에 중력으로 인한 오차는 하루 2초 안팎으로 줄어들었다.그렇게 투르비옹은 200년 넘게 중력을 다스리는 최고의 해법으로 통했다.

까르띠에는 이번 SIHH에서 투르비옹과는 다른 방식으로 중력 오차를 잡는 시계인 ‘아스트로 레귤레이터’를 내놓았다.투르비옹이 끊임없는 자체 회전을 통해 수시로 바뀌는 중력의 중심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오차를 줄였다면,이 제품은 아예 중력의 중심 한 곳으로 몰아가는 방식으로 오류를 시정했다.시계가 수직으로 놓일 때 언제나 아래로 향하는 회전자(rotor)를 중력의 중심이 되도록 설계한 것이다.이 기술로 인해 오차 범위는 하루 1초 이내로 축소됐다.까르띠에 관계자는 “현존하는 시계 가운데 중력으로 인한 오차가 가장 작은 제품”이라며 “시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피아제는 투르비옹이 장착된 오토매틱 시계(손목에 차는 것으로 동력을 얻는 기계식 시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를 선보였다.전체 두께가 1.04㎝에 불과하다.피아제가 기존에 개발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오토매틱 무브먼트(동력장치)인 ‘칼리버 1208P’와 초박형 투르비옹 무브먼트인 ‘칼리버 600P’를 정교하게 결합한 ‘칼리버 1270P’에서 동력이 나온다.

바쉐론콘스탄틴은 전세계 37개국의 시간대를 알려주는 시계를 출품했다.이처럼 많은 나라의 타임존을 한눈에 보여주는 시계를 내놓은 것은 바쉐론콘스탄틴이 처음이다.

◆시계에 스토리를 담은 명품

산업계의 화두로 떠오른 ‘스토리 텔링’ 기법을 시계에 접목한 브랜드도 많았다.반클리프아펠은 18세기 프랑스 공상과학 소설가인 쥘 베른의 소설을 시계판 위에 고스란히 담았다.‘기구타고 5주일’ ‘해저 2만마일’ ‘지구에서 달까지’ ‘지구속 여행’ 등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장면을 다이아몬드 등의 보석과 에나멜 그림으로 형상화한 시리즈물을 선보였다.열기구에서 내려다 본 아프리카 대륙과 남극의 평화로운 모습을 코끼리 기린 펭귄 등 8종의 동물로 각각 표현한 시리즈도 눈길을 끌었다.

보메&메르시에는 이번 SIHH를 아예 이미지 변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별다른 특징이 없는 수많은 고급 시계중 하나’에서 ‘여유로운 삶을 사는 성공한 30~40대의 시계’로 바꾸기 위해 브랜드에 스토리를 불어넣었다.미국 롱아일랜드 바닷가에 있는 햄튼지역이 순식간에 보메&메르시에의 새로운 터전이 됐다.SIHH 부스를 바다와 모래사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급 별장으로 꾸민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이 회사 관계자는 “‘햄튼 하우스에서의 삶’이란 새로운 컨셉트에 걸맞게 주요 시계 모델의 디자인과 색상을 뜯어고쳤다”고 설명했다.

파르미지아니는 시속 432㎞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인 부가티 베이런의 엔진을 빼닮은 시계의 2011년 버전을 출품했다.‘부가티 수퍼 스포츠’ 시계는 파르미지아니의 창업자인 미셸 파르미지아니가 부가티 베이런과 만났을 때의 강렬했던 추억을 기념하기 위해 2004년 내놓은 시계가 모태다.무브먼트를 직각으로 세웠던 기존 모델과 달리 이번에는 비스듬하게 눕혔다.겉을 투명한 사파이어 글라스로 처리한 데다 옆면이 두툼한 덕분에 무브먼트의 움직움을 위,아래,양 옆 등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

◆전통을 업그레이드하다

몽블랑은 크로노그래프(스톱워치 기능의 일종) 탄생 190주년을 맞아 기념작을 내놓았다.이름은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 애니버서리 에디션’.크로노그래프 창시자인 니콜라스 뤼섹에게 바치는 시계를 만든 것이다.이 시계의 기능은 창시자의 작품을 훨씬 뛰어넘는다.몽블랑이 독자 개발한 무브먼트는 부품간 마찰을 최소화해 크로노그래프 기능이 보다 오래 작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한번 태엽을 감으면 72시간 동안 움직인다.동력이 얼마나 남았는 지는 뒷면에 게이지 형태로 표시된다.

예거르쿨트르는 대표 모델인 ‘리베르소’ 탄생 80주년을 맞아 업그레이드 버전을 출시했다.리베르소의 특징은 손목에 찬 채로 시계를 180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폴로 게임중 시계 유리판이 자주 깨진다는 점에 착안,시계를 뒤집으면 금속 재질의 뒷면이 순식간에 앞면에 되도록 한 것이다.이번에 선보인 제품은 금속으로 된 커튼을 시계 유리판 앞에 병풍 펼치듯 두를 수 있도록 고안됐다.그러면서도 180도 회전 기능은 그대로 살렸다.

IWC는 한층 강력해진 ‘포르토피노’ 모델을 선보였다.IWC의 클래식 라인인 포르토피노는 1980년대 중반에 큰 사랑을 받았지만,그 다음에는 ‘포르투기스’ 등 다른 라인에 인기 모델 자리를 내줬었다.IWC는 포르토피노에 한번 태엽을 감으면 8일 동안 동력을 얻는 ‘파워 리저브’ 기능을 처음 달았고,듀얼 타임(시계 하나에 두개의 서로 다른 시간을 보여주는 기능)도 추가했다.정우창 IWC코리아 브랜드 매니저는 “IWC의 7개 라인중 올 한해는 포르토피노를 집중적으로 마케팅하기로 했다”며 “업그레이드된 포르토피노에 한국 소비자들도 매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네바(스위스)=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