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정책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경영상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 공기업의 정리해고는 무효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공기업들은 정부의 선진화 정책에 따라 내년 말까지 인원을 7500명가량 추가로 줄여야 해 이번 판결이 미칠 파장이 주목된다.

정부가 무리한 인원 감축 목표를 설정한 뒤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탓에 공공기관들이 정리해고 등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정리해고 명분 안돼"

서울고등법원 민사 15부는 인천국제공항공사에 근무했던 김모씨가 제기한 해고무효 확인 소송에서 '공사 측의 해고는 무효'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21일 내렸다. 재판부는 "정리해고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을 때 정당성을 갖지만 인천공항은 2004~2008년 연 평균 순이익이 1500억원에 이르는 등 경영 상태가 위기였다고 볼 수 없다"며 "김씨에 대한 정리해고 성격의 직권면직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인천공항이 "정부가 제시한 인원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명한 것에 대해 재판부는 "정부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것만으로 정리해고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인천공항은 2008년 말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에 따라 933명이던 정원을 831명으로 줄이기로 결정했고,구조조정 대상자를 선정해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구조조정 대상자에 포함됐지만 명예퇴직을 신청하지 않은 김씨는 직권 면직을 당했다.

◆내년까지 7500명 추가 감축

이번 판결은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한 공기업 구조조정의 폐해가 드러난 단적인 사례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부는 2008년 하반기부터 2009년 상반기 사이에 수립한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에서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84개 공공기관 가운데 128개 기관의 인원을 2008년 말 17만5645명에서 2012년 말 15만3314명으로 2만2331명(12.7%) 줄이기로 했다.

물론 정부는 지시하지는 않았다. 정년퇴직 등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인원을 줄이도록 했을 뿐이다. 하지만 2,3년 내에 10% 이상의 인원을 줄여야 하는 공기업 관계자들은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인천공항 관계자는 "정년퇴직이나 이직 등 자연 감소분만으로는 정부가 제시한 목표를 채울 수 없었다"며 "감축 목표를 정할 때도 공사 측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3분기 말 128개 공공기관 인원은 16만811명으로 정부가 감축 목표로 제시한 것보다 7497명 많다. 철도공사는 지난해 3분기 말 직원 수가 2만9979명으로 정부가 정한 기준에 맞추려면 내년 말까지 3002명을 줄여야 한다. 한국전력(감축 인원 418명) 한국수력원자력(608명) 기업은행(551명)도 대규모 인원 감축이 불가피하다.

곽채기 동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무리하게 인원을 줄이는 과정에서 공기업 노사 간 갈등이 발생하거나 인천공항처럼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며 "신규 채용을 늘리라고 요구하면서 동시에 공기업 정원은 줄이라고 압박하는 것은 모순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유승호/이현일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