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다. 하필이면 성판악 코스를 고집했을까. 영주 10경의 하나인 녹담만설(鹿潭晩雪)의 유혹이 컸지만 돌아설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전 6시40분.새벽 하늘 높이 얼어붙은 별 무리를 보며 성판악 휴게소를 지난 백록담 초행길은 지루했다. 어둠에 묻힌 눈길은 분간하기 어려워 조심스럽고 주변의 나무는 유령처럼 으스스했다. 30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혼자다. 앞선 이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게 틀림없다. 아이젠 발톱이 눈에 박히는 소리에도,등산복 옷깃이 스치는 소리에도 흠칫흠칫 놀란다.


◆끝없는 인내의 길

이대로 걷는다면 정상을 밟을 수 있을까. 5 · 16도로의 최고점인 성판악 휴게소가 해발 750고지이니 백록담과의 표고차가 1200m나 된다. 편도 9.6㎞로 완만한 오름길이라지만 만만히 볼 수는 없다. 늦어도 낮 12시까지 도착해야 하는 7.3㎞ 앞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넉넉 잡아 3시간 길이다. 앞으로 4시간반가량 남았으니 적어도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제지당하는 일은 없겠다.

성판악에서 2㎞쯤 해발 900m 지점을 지난다. 성널오름 옆으로 난 길이다. 높이 30m,폭 300m 규모의 수직 암벽이 있어 성널오름이라고 불린다. 성판악이 바로 이 성널오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1시간반,3.5㎞ 지점에 속밭이 나온다. 이미 해발 1000m 고지에 올라섰다. 1970년대 초반까지 진달래가 무성한 초원지대였다는데 지금은 삼나무 숲이 울창하다. 쭉쭉 뻗은 삼나무에 하얀 눈이 얹혀진 풍경이 제법 볼만하다. 기념사진 포인트다. 아침 햇살이 부족해 우중충한 게 아쉽기는 하다. 속밭에서 사라오름까지의 길 풍경도 이제까지와 다른 게 없다. 재미없는 연속극 재방송을 보는 것 같다. 나름 재미있는 놀이를 떠올린다. 눈이 쌓인 나뭇가지 형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주인을 반기는 애완견,저것은 외계에서 온 괴물,다시 이것은 커다란 눈망울의 송아지 하는 식이다.

5.6㎞ 지점에 사라오름 입구가 나온다. 사라오름은 제주도 화구호 중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오름이다. 지난해 말 일반에 개방됐다. 산행길에서부터 20분쯤 올라가야 한다. 사라오름은 제주도 6대 명혈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당자리란 소리도 있다. 여러 기의 무덤도 확인된다.

사라오름 입구부터가 고비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1.7㎞가 내내 오름길이다. 종아리에 경련이 일고 급기야 허벅지 근육까지 떨린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한걸음 내딛고 멈춰서 쉬기를 반복한다. 혹시 산악구조대나 헬기를 불러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에 무릎이 꺾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하늘이 확 터진다. 온 세상이 환해진다. 진달래밭 대피소다. 오전 9시50분이니까 성판악에서 3시간10분 걸렸다.

◆아! 백록담

진달래밭 대피소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뜨끈한 컵라면 국물과 성판악 휴게소에서 산 김밥 두 줄이 진수성찬이다. 그냥 내려가려는 마음을 되돌려 세우는 힘을 준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백록담까지는 2.3㎞.등산 안내판에 1시간30분 길이라고 쓰여 있다.

10시30분,백록담을 향해 마지막 힘을 낸다. 날씨는 더없이 좋다. 대피소 상황판의 기온은 영하 2.7도.바람은 한점도 없다. 한 산악회 회원은 "한라산 꼭대기 날씨가 정말 이렇게 좋을 수도 있냐"며 연방 고개를 흔든다. 아차,컵라면으로 얻은 힘을 너무 믿었나. 한번 뭉친 다리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근육 한가닥 한가닥이 끊어졌나 싶을 정도로 아프다. 어쩔 수 있나. 털썩 주저앉아 주무르며 달랠 수밖에.

터널 같은 나무숲에서 빠져나오자 하늘이 확 트이면서 백록담까지 이어진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 하얗게 눈을 인 백록담 화구벽이 당당하다. 나무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산행객들은 개미처럼 보인다.

두 번 세 번 마음을 돌려 드디어 1800고지에 놓인 평상에 큰대자로 눕는다. 이어지는 계단길의 1900m 표지석은 자기도 힘이 든다는 듯 난간에 기대있다. 이제 50m,아니 33m 남았다. 한라산은 1950m이지만 등산객이 오르는 동릉은 1933m이기 때문이다. 그 30여m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보다 긴 것 같다.

12시25분,드디어 정상이다. 한라산동릉정상 표지목 아래 백록담이 웅장하다. 저 아래 동쪽 능선의 구상나무군락 풍경도 장관이다. 구상나무군락 너머의 사라오름 성널오름 흑붉은오름 돌오름 물오름 등 오름들과 오름 위로 몰려드는 구름이 겨울 백록담에서만 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을 연출한다.

한라산=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 여행팁

성판악 산행로는 1131번도로(5ㆍ16도로) 성판악 휴게소에서 시작한다. 속밭~사라오름~진달래밭 대피소~백록담 동릉 정상까지 9.6㎞다. 11월부터 2월까지 동절기에는 오전 9시 전에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낮 12시까지는 진달래밭 대피소에 가야 백록담 정상 도전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없고 주차료만 받는다. 소형 승용차 1800원.60대 정도 세울 수 있다.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2분 간격으로 성판악 입구를 거치는 버스가 출발한다. 40분 정도 걸린다. 1500원.

무리하지 않고 한라산 설경을 즐기려면 영실 코스가 안성맞춤이다. 영실 휴게소에서 병풍바위를 거쳐 윗세오름까지 3.7㎞로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즐길 수 있다. 백록담 화구별이 우뚝한 윗세오름 일대의 설경이 압권이다. 만세동산 설경이 좋은 4.7㎞의 어리목 코스,지옥 코스로 알려진 8.7㎞의 관음사 코스,한라산 산행로 중 유일하게 서귀포에서 시작하는 9.1㎞의 돈내코 코스 등 5코스를 이용해 한라산의 설경을 구경할 수도 있다. 한라산국립공원 성판악관리소(064)725-9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