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이 묘하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언을 빗대어 "공정거래위원회가 묘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본연의 임무인 경쟁 촉진은 뒷전으로 미룬 채 물가 잡기에만 '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 원가 자료마저 통째로 가져가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다.

기업들은 공정위 조사가 본격화된 지 2주 가까이 지난 지금도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겉으로는 내색조차 못한다. 공정위에 밉보이기 싫어서다. 전문가들은 "견제받지 않는 공정위의 권력 구조가 문어발식 월권 행위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법기관과 비교하면 공정위는 '검사'에 해당하는 조사 및 소추(소 제기) 기능과 '판사'에 해당하는 심판 기능을 함께 가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비판이다.

◆"원가 자료 요구는 조사권 남용"

[공정위 '월권' 논란] 원가자료 뺏긴 기업들 "왜 영업기밀까지 뒤지나"
공정위는 지난 13~17일 정유사에 대한 현장 조사에서 석유 제품의 원가 자료를 비롯한 각종 가격 정보를 싹쓸이해 가져갔다. 정유사들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휘발유나 경유 같은 석유 제품 가격은 국제 시세에 직접 영향을 받는 만큼 담합 등의 잣대를 들이대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원가 산정이 힘들다는 것도 문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원유를 정제하면 휘발유 등유 중유 등 10여개 제품이 나온다"며 "여러 석유제품의 원가를 일률적으로 산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사권 남용'이란 지적도 나온다. 2005년 공정위 사무처장을 지낸 허선 화우(법무법인) 컨설턴트는 "담합 조사에는 원가 자료가 필요없고 불공정거래 조사를 할 때도 공정위가 직접적으로 원가 자료 공개를 요구한 적은 과거에 없었다"며 "권력남용"이라고 말했다.

◆검사와 판사가 한몸

공정위는 담합이나 불공정행위를 직접 조사하고 소추하는 것은 물론 과징금 부과 등 심판 기능도 함께 한다. 행정의 효율성이 높지만 조사를 당하는 기업 입장에선 방어권 보장이 어렵다.

실제 공정위가 판정을 내린 사안은 법원의 1심 판결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이에 비해 다른 행정기관들의 결정 사항은 단순한 행정 조치다. 기업들이 공정위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같은 이유로 선진국들은 조사 · 소추 기능과 심판 기능을 직접 분리하거나 최소한 조직 내에 확고한 '방화벽'을 두고 있다. 예컨대 영국은 조사 · 소추 기능은 공정거래청,심판 기능은 경쟁위원회가 각각 나눠 맡고 있다. 미국은 한국처럼 연방거래위원회(FTC) 내에 조사 · 소추와 심판 기능이 공존하지만 내용적으론 두 기능이 독립성을 철저히 유지하고 있다. 심판 기능을 가진 위원의 전문성과 독립성도 보장된다.

반면 한국의 공정위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공정위 출신의 한 관계자는 "상임위원 중 일부는 공정위 출신으로 위원장의 지시를 거스르기 어렵고 비상임위원은 전문성이 떨어지기 쉽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선 공정위원장의 임기 보장마저 제대로 안되고 있다. 공정위원장 임기는 3년이지만 현 정부 들어서만 수장이 벌써 세 번째 바뀌었다.

신현윤 연세대 법학과 교수(한국경쟁법학회 회장)는 "미국 FTC 위원들의 임기가 7년인데 우리는 3년이고 그나마 다 마치기도 어렵다"며 "공정위는 시장 경제의 파수꾼으로서 모든 부문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측면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국도 심판 기능과 조사 · 소추 기능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공정위가 물가기관?

공정위의 기본 임무도 헷갈린다. 지난 3일 취임한 김동수 위원장은 공정위를 '물가 기관'으로 규정했다. "공정위가 물가기관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은 색출해 인사조치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정거래법 어디를 봐도 공정위와 물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전문가들이 "본말이 전도됐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공정위의 기본 임무는 경쟁 촉진이며 물가 안정은 공정위의 담합 및 불공정거래 조사가 제대로 진행됐을 때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효과일 뿐 공정위가 직접적으로 물가를 겨냥해 행정력을 발동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정위가 물가에 집중하다보면 경쟁 촉진 등 본연의 임무에 투입할 인력이 부족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주용석/서기열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