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미술시장은 아시아 출신의 작가들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크리스티,소더비 등 세계 굴지의 경매회사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국적의 경매회사들도 앞다퉈 경매를 개최하고 있다.

우리 회사도 2008년 홍콩 법인을 세우고 현지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번 홍콩 현지에서 경매를 열면서 중요한 아시아 고객들을 확보하게 됐다. 이들의 한국 미술품에 대한 관심은 컸다. 한류의 영향과 중국 근현대 미술품 가격이 급상승하면서 그 대안으로 한국 미술품을 찾은 것이 중요한 이유다.

화교인 인도네시아 고객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사업체를 경영하는 이 고객은 자카르타에 미술관도 갖고 있다. 그가 나를 미술관 개관식에 초청했다. 나는 출국에 앞서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고민 끝에 현대미술 소장가인 그에게 한국 근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영문 화집을 사다 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영문 화집을 알아보던 우리 직원이 울상이 돼 찾아왔다. 이유는 내가 찾는 한국 근현대미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영문 화집이 없다는 것이다. 간신히 찾아낸 책 한 권이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그런 화집은 아니었다. 그 순간 수년 전 소더비 홍콩경매 책임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당시 소더비는 한국 미술을 취급하기 위해 준비하던 때라 평소 알고 지내던 나를 찾아와 한국 미술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그는 떠나가기 전에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회사에서 만든 경매도록이 자기에게는 지침서라는 것이었다. (경매도록은 영어와 중국어,한국어로 돼 있다) 그때는 내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인사치레라 생각했다.

나는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화집을 찾다가 그녀의 얘기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우리 근현대미술을 멋지게 소개한 영문 화집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일본 출장 시 구매한 일어와 영어로 된 한국 도자기 관련 서적을 선물할 수밖에 없었다. 자카르타에서 만난 초청인사들 중에는 중국 현대미술의 세계적 소장가인 울리식과 중국 현대미술의 대표적 작가 위에민준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소장가는 권위적이지 않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나는 준비해간 책을 건넸다. 나에게 먼저 감사의 뜻을 전한 그는 덧붙여 본인의 관심사는 현대미술이라고 말했다. 나는 졸지에 그의 취향도 모르는 센스 없는 사람이 됐으나 사실을 말하는 건 창피한 일이었다. 나는 한국 현대미술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한 명의 세계적인 작가로 인해 국가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는 일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미켈란젤로,렘브란트,윌리엄 터너,앤디 워홀 등 그 예는 수없이 많다.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 환영리셉션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영부인 행사가 삼성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그러나 한국 미술을 소개하는 제대로 된 영문 화집 하나 없는 토양에서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높여줄 세계적인 작가가 배출될 수 있을까?

이학준 < 서울옥션 대표 junlee@seoulauctio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