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런던 출장을 갔을 때 일이다. 우연히 외국 경매회사 스페셜리스트들과 같은 호텔에 묵게 돼 저녁을 함께 하게 됐다. 평소 서로 알고는 지냈으나 사무적인 일 외에 별달리 깊이 있는 대화를 할 기회가 없어 항상 아쉬웠던 차였다. 모두 아시아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비슷한 일을 하는 처지라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자연스럽게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미술에 대한 얘기들이 오갔다.

그중 한 명은 우리나라 미술에 대해 조예가 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 작가들이 재능 있고 작품이 세련됐으며 국제적인 감각도 있다고 평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마디에 속이 쓰렸다. 한국 현대미술이 대체로 너무 예뻐 보여 금세 싫증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기인한다. 국내 미술시장에서는 개인 구매자 비중이 90%에 달할 정도로 절대적이다. 주로 집안에 걸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밝고 장식성이 있는 작품들이 선호된다.

한국미술이 발전하려면 기업 및 정부기관의 적극적인 컬렉션이 필요하다.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수준 높은 기업 미술품 컬렉션들이 많다. 스위스의 대표적 금융그룹인 UBS의 소장품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규모면에서도 3만5000여점에 이른다. 컬렉션 범위도 195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고 다양하다.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1만여점인 것에 비하면 대단한 규모다. UBS는 세계적 아트페어인 바젤아트페어를 후원하면서 기업의 이미지도 높이고 돈 많은 개인 컬렉터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펩시코는 본사에 야외 조각공원을 운영한다. 공동 창업자이자 당시 최고경영자(CEO)였던 도널드 켄덜이 1970년 펩시 본사를 맨해튼에서 약 한 시간 거리인 퍼처스로 옮기면서 구상했다. 옛날 폴로클럽이었던 이 공원 규모가 무려 1.68에이커(2000평)에 달한다. 넓은 잔디밭과 각종 꽃,수련이 가득한 연못들과 어울린 컬렉션 규모는 45점으로 그리 크진 않지만 자코메티,칼더,헨리 무어,포모도로 등 20세기 세계적인 조각가의 작품들이 있다. 내 친구 중 한 명이 이곳에서 일했고 나도 그를 통해 이곳을 알게 됐다. 그는 미술품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지만,틈만 나면 이곳 자랑을 했다.

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물어봤다. 그는 회사가 규모와 명성에서 세계적이며 무엇보다 회사 정원이 미국 3대 조각공원의 하나라는데 자부심을 갖는다고 대답했다. 주말에 근무하더라도 공원 가는 것 같아 좋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개성 있는 소장품을 갖춘 기업 컬렉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각 기업의 성격에 맞는 소장품을 많이 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이학준 서울옥션 대표 junlee@seoulauct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