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집트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있지만 미국은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원론적인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미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중동 지역에서 차지하는 이집트의 지정학적 비중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수에즈 운하가 대표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수에즈 운하가 아직까지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번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경우 폐쇄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31일 보도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는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아시아와 유럽을 관통하는 핵심 물류 이동통로다.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세력 다툼은 과거에도 치열했다. 1869년 개통 당시부터 영국 프랑스 오스만튀르크 간에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1956년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은 2차 중동전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면 막대한 통행료 수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물류 이동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 이집트 정부가 지난해 수에즈 운하의 통행료로 얻은 수익은 50억달러에 달했다. 이집트 정부는 거의 매년 통행료를 인상하고 있다. 전 세계 선박들은 어쩔 수 없이 비싼 통행료를 지불해야 하는 입장이다.

수에즈 운하의 폐쇄 가능성은 국제유가를 들썩이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비가맹국인 이집트는 일일 생산량이 70만배럴 이하로,세계 석유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석유 물량은 하루 100만배럴에 이른다. 최근 이집트 시위가 확산되면서 국제유가가 치솟은 것도 수에즈 운하의 폐쇄로 석유 이동이 차질을 빚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는 석유시장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가 패권을 발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당시 공군사령관이던 무바라크는 대통령에 취임한 뒤 줄곧 친미 · 친서방 정책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는 중동 지역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석유를 수급받을 수 있었다. 또 이집트가 중동 세계의 긴요한 중개자이자 균형추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미국이 중동 지역에 패권을 행사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만약 시위 여파로 수에즈 운하가 장기 폐쇄되거나 무바라크가 퇴진 후 반미 이슬람 극단주의 정부가 들어서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다면 미국의 중동 지역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할 것이란 분석이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