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전자업체 필립스를 이끌고 있는 제라르 클라이스터리 회장은 2006년 고심 끝에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기로 했다. "반도체 매각은 회사의 심장을 파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내부에선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그의 뜻은 확고했다. 반도체,휴대폰,오디오 등 14개 사업을 구조조정한 뒤 그가 선택한 것은 성장성이 높은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사업이었다. 구조조정 직후 필립스는 M&A(기업 인수 · 합병)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5년.전 세계에서 팔리고 있는 전구 4개 중 1개는 필립스의 LED 전구가 됐다. '클라이스터리의 매직'이라고 불리는 필립스 조명사업 성공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글로벌 분업의 성공

지난 25일 필립스 LED 조명의 핵심인 'LED칩'을 만들어내고 있는 필립스 루미레즈 새너제이 공장을 찾아갔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계 소음이 귀를 에워쌌다. 커다란 기계들 사이에 더러 하얀 방진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30억원을 호가하는 MOCVC(유기금속화학증착기) 수십대가 가동 중이었다.

필립스는 LED 조명 시장 진출의 첫 신호탄으로 루미레즈(2006년)를 사들였다. 1967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LED를 만들어낼 정도로 앞선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었다. 필립스는 루미레즈 인수 후 '글로벌 분업'이란 전략을 세웠다. LED 칩을 만들기 위해선 '에피(EPI · 결정성장)-웨이퍼 공정-패키징'등의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글로벌 기지로 각기 나눠 맡겼다. 사파이어 기판에 유기금속 화합물을 얇게 덧씌우는(증착) 에피 단계는 R&D 센터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진행했다. 연구원들이 생산시설을 드나들며 새로운 핵심 기술을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웨이퍼에 전극을 연결해 전기에너지를 가하면 총천연색을 내도록 하는 웨이퍼 공정은 싱가포르로 내보냈다. 물류비용이 들지만 아시아 시장에서의 대응력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을 노렸다. 인건비가 많이 드는 마지막 패키징(후공정)은 말레이시아로 돌렸다. 회사 관계자는 "글로벌 분업으로 전체 매출 가운데 LED 조명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12%에서 지난해 13%로 높아졌다"며 "2015년까지 글로벌 LED 조명시장에서 1위를 굳히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전방위 M&A와 핵심인력 영입 나서

필립스는 이듬해인 2007년 미국 LED 조명설계 전문회사인 '컬러키네틱스'를 사들였다. 칩을 생산해 전구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LED 조명을 설계해주는 '솔루션'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뉴욕에 있는 필립스 컬러키네틱스엔 무대조명 전문가를 스카우트해 기술담당자로 앉혔다.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 등으로 구성된 CPAT(Customer Program Application Team)라고 불리는 별동부대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본사와 중국 상하이에 만들었다. 이들의 임무는 '디자인'.빌딩 외관을 장식하고(경관조명),도로를 비추는(거리조명) 데 필요한 모든 프로그램 설계와 디자인을 담당한다. 나이젤 디아크레 필립스 컬러키네틱스 아 · 태지역 마케팅 담당자는 "필립스 조명사업부는 애플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며 "도시 외관을 바꾸는 조명에서부터 병을 낫게끔하는 치료용 조명까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기에 LED 조명을 적용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라고 설명했다.

광원에서 조명 솔루션을 제공하는 사업구조로 재편한 필립스는 조명으로만 지난해 76억 유로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지만 사업확장을 위해 M&A도 멈추지 않을 태세다. 2006년 루미레즈를 기점으로 지난해 말까지 필립스가 인수한 회사는 모두 10여곳.2009년 프리미엄 실내건축 조명업체인 이탈리아의 일티루체를 사들인 데 이어 지난해 말엔 루시플랜이란 이탈리아 조명 디자인 업체를 인수해 디자인 파워를 키웠다. 김일곤 필립스코리아 조명사업부 상무는 "광원에 이어 조명 디자인,시스템 제공 등을 위해 글로벌 차원의 M&A를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너제이=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