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리는 동료들로부터 '가을 사나이'로 불린다. 여름까지는 베짱이처럼 빈둥대다가 가을만 되면 열정적인 근무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연일 야근 행군에다,주말 출근까지 불사하는 그에게 동료들이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하지만 이 대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름의 생존전략인 까닭이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연말에 시작되는 개인별 실적평가다. 어차피 고과 점수를 매기는 상사들도 인간인 법.연초보다는 연말,그것도 고과 직전의 기억이 생생한 만큼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이 대리의 지론이다.

철저한 인사고과에 따른 승진과 성과급 지급이 확산되면서 김 과장,이 대리들의 직장생활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행여 주변 동기들에 비해 뒤처지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다. 하지만 어쩌랴.살아남는 게 강하다지 않은가. 수많은 김 과장,이 대리들이 '역전의 여왕'을 꿈꾸는 이유다.


◆인사시즌만 되면 터지는 신규 계약

이 대리가 가을 사나이라면,대기업의 민 모 대리(33)는 '밀어내기'의 선수다. 대박계약을 아껴뒀다 막판에 '빵'터뜨리는 기술이 그의 특기다. 평상시엔 오후 6시 칼퇴근을 철칙처럼 지킨다. 게다가 신규 제휴사를 뚫는다는 핑계로 팀의 접대비를 야금야금 써댄다. '굴러 들어온 돌'(경력사원)이다 보니 그의 행동거지를 눈여겨 보며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윗분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인사 평가 시즌이 되자 180도 달라졌다. 신규 계약을 터뜨리기 시작한 것.민 대리는 순식간에 팀 비용을 축내던 뺀질이에서 팀 실적을 거뜬히 채워 준 '구세주'가 됐다. 티끌이라도 모으고 싶던 팀장의 입이 귀에 걸린 것은 물론이다. 결국 인사 평가에서 'S등급'을 받으며 화려하게 특진했다. 민 대리는 "대박카드는 아껴뒀다가 시기에 맞춰 꺼내는 게 요령"이라고 귀띔했다.

◆인맥활용형 역전

동기와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전문직 김모씨(31).경쟁심이 강했던 김씨는 동기에게 밀리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다. 실적이나 사내 평판에서 동기를 크게 앞서지 못했기 때문.나름 성과는 냈지만 동기를 제치고 팀장 눈에 쏙 들기에는 '2%'부족하다는 게 김씨의 판단이었다.

이때 빼든 카드가 인맥이다. 마침 고객사 팀의 '넘버 3'가 김씨의 대학연합동아리 선배였다. 선배는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니라 '위장'하기도 쉬웠다. 김씨는 연합동아리 선배들을 끌어모아 '동아리 OB모임 결성' 등을 핑계로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그 선배와의 개인적 접촉 빈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사적모임이었지만,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티'를 확실히 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회사 팀장과의 고객사 미팅에서 동아리 선배는 "그 친구(김모씨)가 열심히 하더라고요"라는 칭찬을 몇 방 날려주었다고 한다. 김씨는 프로젝트가 끝난 후 팀장의 대우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직 한 방에 갑을 관계 역전

홍보대행사를 다니던 최모 과장(36)은 중견기업 홍보팀으로 이직한 후 '관계의 역전'이 얼마만큼 짜릿한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할 때 회사에서 지정해 주는 고객사가 자신의 궁합과 맞지 않아 힘들었다. 홍보대행사엔 남자가 귀하다보니 성격이 털털한 자신에게 '진상 고객사'나 클레임이 유독 많은 고객사 대응을 대부분 맡겼던 탓이다. 누가 맡더라도 클레임을 걸어대는 고객사인데도 회사 임원은 최 과장에게 책임을 물었다. 결국 그는 퇴사 후 중견기업의 홍보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옮긴 회사에서 그는 단기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홍보대행사 공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열었고 그 자리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그 자리엔 전 회사에서 자신을 미워하던 임원과 그 옆에 찰싹붙어 최 과장에 대한 뒷담화를 주도하던 김모 부장이 나타났다. 최 과장은 "내가 강력하게 주장해 전에 다니던 홍보대행사를 떨어뜨렸다"며 "이직 한 방에 갑과 을이 바뀌니 정말 통쾌하다"고 말했다.

◆역전의 역전이 필요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무원이 된 한모씨(29 · 여)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녀의 상사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침좀 뱉고 껌좀 씹던' 한씨는 그 동창을 대놓고 왕따시킨 적이 있었다. 당시에 한씨는 잘나갔던 반면 왕따당하던 동창은 공부 빼고는 내세울 게 없는 '평범이'였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행정고시를 패스해 5급 공무원이 된 그 동창이 하필이면 한씨의 결재라인에 있었던 것.오지랖 넓은 호사가들 때문에 한씨의 존재를 알게 된 동창의 보복이 시작됐다.

한씨 업무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은 것은 물론 한씨의 팀장까지 귀찮게 한 것.심지어 소규모 고교동문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동창이 대놓고 한씨를 싫어하는 티를 내자 한씨는 동문모 임에도 나가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주눅이 든 한씨는 업무적응도 힘들었고,성격도 어두워졌다. 한씨의 또 다른 동창인 박모씨는 "고등학교 시절 퀸카로 잘나가던 한씨가 고시 패스한 친구를 한 직장에서 만나 10년 만에 역전당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말했다.

◆원칙의 위력

벤처기업에서 기획조정 업무를 맡고 있는 이모 차장(37)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하다 지금의 사장과 술자리 합석이 인연이 돼 입사한 그는 자신의 주장이 강한 게 탈이었다. 입사 후 사장이 지시하는 일을 거부하는 경우가 잦았다.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입사 넉 달 만에 사장이 "내가 왜 저 사람과 술을 먹게 돼서…"란 막말을 해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이 차장은 '회사가 발전하는 것이 사장에게도 결국은 이로운 것이란 진심을 사장이 언젠가 알아줄 것'이라 믿고 우직하게 밀고 나갔다.

그의 진가는 2년 후 대기업과 양해각서(MOU)를 맺을 때 발휘됐다. 회사 입장에선 절대 놓칠 수 없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벤처기업이라는 한계와 순혈주의를 고집하다보니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을 가진 직원이 없었다. 이때 나선 것이 이 차장이었다. 컨설턴트 출신답게 외부 인맥을 총동원해 MOU 상대인 대기업의 회계 정보 수집부터 각종 법률 자료까지 준비했다. MOU 전 대기업 임원진 앞에서 공개 프레젠테이션까지 이 차장이 진행했다.

사장은 프로젝트를 포기하려고 했지만 평소 '고집'만 내세웠던 이 차장의 우직함이 제때 위력을 발휘해 프로젝트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 사장은 이 차장을 실장으로한 기획조정실을 만들었다. 직원 선발권은 물론 감사업무까지 맡기는 파격적인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동윤/이관우/이고운/강유현/강경민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