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선정 문제가 뜨거운 감자다. 충청권은 기득권을 주장하고 있고 광주광역시,경기도,포항,대구,울산,창원 등 지방자치단체가 유치경쟁에 뛰어들고 정치인들도 가세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 쟁점화 돼버렸다. 그동안 정부가 최적지를 선정하겠다는 원칙론만 되풀이하고 아무런 결정을 못한 탓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 방송좌담회에서 "과학벨트는 지난 대선 당시 여러 가지 정치상황이 있었고,혼선을 일으킬 수 있는 공약이 선거 과정에서 있었다"면서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과학자들이 모여 과학자들 입장에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은 이에 반발,충청권 유치를 기정사실로 하지 않을 경우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민주당 내 일부 호남지역 정치인들은 광주 유치를 주장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도 견해가 갈려 있다. 세종시 수정안도 무산됐는데 충청권에만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충청권 이외 지자체에서 나온다.

지역 간 갈등을 빚는 사업은 또 있다. 동남권신공항(제2허브공항) 후보지를 놓고 대구 · 경북 · 경남과 부산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주택공사와 토지공사가 통합한 LH(한국토지주택공사) 본사도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상태다.

입지선정을 둘러싸고 지역 간 갈등과 시비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중앙정부가 이곳저곳 눈치 보고 결정을 못하고 있는 건 문제다.

과학벨트 입지 선정을 머뭇거릴 까닭이 없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과 원칙을 세워 놓고 거기에 걸맞은 조건을 검토해서 최적지를 고르면 되는 일이다.

그곳이 충청이라면 누가 마다할 것인가. 특정 지역에도 좋으면서 국가 전체에도 좋은 그런 곳을 찾아야 한다. 특정 지역을 홀대해서도,특별 배려해서도 안 된다. 지역 간 경쟁이 있다 해서 그런 걸 교통정리 못 한다면 중앙정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과학벨트 입지를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결정하는 건 당연하다. 정치인들이 정치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국가 미래가 걸린 기초과학의 틀을 다지는 국가적 사업이 지역 간 힘 겨루기와 정치적 계산으로 결정될 수는 없지 않은가.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수도이전 공약은 선거에서 위력을 발휘했지만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결국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그 공약으로 '재미를 본' 뒤의 일이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는데 수도를 분할하는 세종시 건설계획이 다시 추진돼 우리 사회가 겪은 갈등과 고통은 참으로 컸다.

세종시 원안(국무총리와 행정부 9부2처2청 세종시 이전)은 수도를 분할하는 것이다. 그걸 막고자 이명박 정부가 수도분할을 백지화하고 세종시를 교육 · 과학 중심의 경제도시로 바꾸겠다는 수정안을 내놓았지만 국회에서 부결됐다. 충청권의 표심을 얻겠다는 각 정당과 정파의 정치적 계산 결과였다. 수도분할이 국가적 낭비와 국정의 비효율을 초래할 것이라는 게 훤히 보이는데 눈앞에 어른거리는 표만 쫓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그랬다.

과학벨트도 공약이니까 충청권에 입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제2의 세종시 사태를 연상시킨다. 공약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키기 어려운 공약도 있고 상황이 바뀌어 지키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공약도 있다. 공약을 들먹이며 잘못된 결정을 해서도,또 하자고 해서도 안 된다. 공약을 어기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옳은 일을 옳게 하는 것이 정권의 역사적 책무다. 국민은 그런 책무를 정권에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 한다. 정치적 쟁점이 돼버린 과학벨트 문제를 정치적 압력을 극복하며 잘 처리할 수 있을까. 과학벨트 결정에 정치인은 손 떼고 과학자에게 맡기는 게 순리다.

류동길 < 숭실대 경제학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