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그림자를 갖고 있을 때 비로소 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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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유작 소설·산문집 출간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고(故)이윤기씨(사진)의 유고 소설집 《유리 그림자》와 산문집 《위대한 침묵》(민음사 펴냄)이 동시에 출간됐다. 작고한 지 6개월 만이다. 그리스 · 로마 신화와 이 시대 영웅들의 얘기를 번역한 시리즈로 국내에 신화 열풍을 일으킨 고인의 유작에선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문인으로서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진다.
《유리 그림자》는 《노래의 날개》(2003년)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내용과 문체는 수필을 닮았다. 짧막한 소설 네 편 속의 화자들은 모두 작가 자신인 듯하다. '네눈이'와 '소리와 하리'는 개를 기르면서 인간성과 생명의 섭리에 대해 깨닫는 내용이다. '종살이'는 싫은 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치과의사 후배에 대한 얘기이고,표제작 '유리 그림자'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나'의 고향 여자친구와 그 딸의 결혼식에 얽힌 내용이다. 단편소설들은 문학평론가 정영훈 · 백지은씨의 작품해설 및 작가 연보와 함께 묶였다.
경험으로부터 길어 올린 이야기꾼답게 그가 풀어놓는 말은 경쾌하다. 작가 특유의 유머와 재치,해학은 세련된 완곡법과 군더더기 없는 필치,여운이 깊은 문장들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친구나 자녀에게 들려주는 듯한 구수한 이야기에선 삶과 자연에 대한 따뜻함도 짙게 배어난다.
주말에 골프장에 나가 가벼워진 몸을 확인하기 위해 주중에는 발목에 납으로 된 각반을 차고 다니던 치과의사 후배에게 '나'는 "진정한 자유가 어떤 것인지 주말이면 확실하게 깨닫게 될테니 주중에는 내 집에서 종살이를 해보지 그래?"라고 말하고는 미안한 마음에 1년이나 그를 찾아가지 못한다.
너무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쳐 죽음을 맞는 새들을 보면서는 "사물은 그림자가 있어야 비로소 온전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산문집 《위대한 침묵》의 에세이 37편에는 삶과 인생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훨씬 직설적이고 유쾌하게 표현돼 있다. 양평의 시골집 주변 황무지 땅에 1000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그는 "나무만이 희망이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몇 년 후 큰 비에 나무들이 떠내려가자 "나무 솎아 팔았다고 일희(一喜)하고,나무 심은 땅 유실됐다고 일비(一悲)하는 내가 한심하다. 조심하자.재앙은 홀로 오지 않고,복은 다시 구할 수 없는 것이거니"하며 탄식한다.
미시간주립대 석좌교수였던 고(故) 임길진 박사가 남긴 포도주 이야기,'화수(화가 겸 가수)'로 지칭한 지인 조영남씨와 얽힌 조각품 도난 사건 등 주위 사람들에 대한 소소한 일화부터 가족에 대한 추억,신화와 문학 이야기,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까지 폭넓은 사색이 담겨 있다.
고 임길진 박사를 추모한 글에서 "죽음은 죽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렇듯 잊히지 않고 있으니,그 떠난 자리가 아름답다"는 고인의 말은 자신에게도 통하는 대목이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
《유리 그림자》는 《노래의 날개》(2003년)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내용과 문체는 수필을 닮았다. 짧막한 소설 네 편 속의 화자들은 모두 작가 자신인 듯하다. '네눈이'와 '소리와 하리'는 개를 기르면서 인간성과 생명의 섭리에 대해 깨닫는 내용이다. '종살이'는 싫은 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치과의사 후배에 대한 얘기이고,표제작 '유리 그림자'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나'의 고향 여자친구와 그 딸의 결혼식에 얽힌 내용이다. 단편소설들은 문학평론가 정영훈 · 백지은씨의 작품해설 및 작가 연보와 함께 묶였다.
경험으로부터 길어 올린 이야기꾼답게 그가 풀어놓는 말은 경쾌하다. 작가 특유의 유머와 재치,해학은 세련된 완곡법과 군더더기 없는 필치,여운이 깊은 문장들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친구나 자녀에게 들려주는 듯한 구수한 이야기에선 삶과 자연에 대한 따뜻함도 짙게 배어난다.
주말에 골프장에 나가 가벼워진 몸을 확인하기 위해 주중에는 발목에 납으로 된 각반을 차고 다니던 치과의사 후배에게 '나'는 "진정한 자유가 어떤 것인지 주말이면 확실하게 깨닫게 될테니 주중에는 내 집에서 종살이를 해보지 그래?"라고 말하고는 미안한 마음에 1년이나 그를 찾아가지 못한다.
너무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쳐 죽음을 맞는 새들을 보면서는 "사물은 그림자가 있어야 비로소 온전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산문집 《위대한 침묵》의 에세이 37편에는 삶과 인생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훨씬 직설적이고 유쾌하게 표현돼 있다. 양평의 시골집 주변 황무지 땅에 1000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그는 "나무만이 희망이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몇 년 후 큰 비에 나무들이 떠내려가자 "나무 솎아 팔았다고 일희(一喜)하고,나무 심은 땅 유실됐다고 일비(一悲)하는 내가 한심하다. 조심하자.재앙은 홀로 오지 않고,복은 다시 구할 수 없는 것이거니"하며 탄식한다.
미시간주립대 석좌교수였던 고(故) 임길진 박사가 남긴 포도주 이야기,'화수(화가 겸 가수)'로 지칭한 지인 조영남씨와 얽힌 조각품 도난 사건 등 주위 사람들에 대한 소소한 일화부터 가족에 대한 추억,신화와 문학 이야기,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까지 폭넓은 사색이 담겨 있다.
고 임길진 박사를 추모한 글에서 "죽음은 죽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렇듯 잊히지 않고 있으니,그 떠난 자리가 아름답다"는 고인의 말은 자신에게도 통하는 대목이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