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겠습니다. "1982년 5월,로스앤젤레스(LA) 미주본부의 신임 대리 윤영두가 공석이던 금호실업 휴스턴 지점장 자리에 가겠다며 손을 들었다. 그의 당돌한 요청에 주변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편한 LA 생활을 버리고 왜 낯선 휴스턴을 가겠다고 하는지 선뜻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LA 미주본부는 금호실업 내 최고의 보직으로 통했다. 그 자리를 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은 입사한 지 4년째인 1981년 10월에 꿰찼다. 하지만 윤 사장에게 LA 생활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는 게 지독히도 싫었다. '도전'이라는 글자를 되뇌며 당차게 시작한 미국 생활이었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못 쓰는 날이 많았다. 한국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휴스턴행이 절실했던 이유였다.

처음에 그의 요청은 단번에 퇴짜를 맞았지만 곧바로 행운이 찾아왔다. LA에 비해 교육,날씨 여건이 열악한 휴스턴으로 가겠다는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5월이 끝날 무렵,윤영두는 10번 하이웨이를 타고 휴스턴까지 장장 1주일을 혼자 차를 몰며 가게 된다. 1년 7개월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윤 사장은 지금도 당시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비서조차 미국인이었으니 영어를 원어민처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입사 5년차에 한 조직의 리더로서 모든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복했던 유년 시절

윤 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이상할 정도로 해외 생활을 동경했다고 한다. 시원한 이목구비와 새하얀 피부 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선 '미국 사람'이라고 불렸다. 비행기라곤 군용기밖에 구경하지 못했던 시절부터 윤 사장의 꿈은 미국에 가 있었다. 기업인이던 선친의 큰 그늘이 자유로운 꿈을 펼치도록 만들어 줬다.

광주광역시 서석초등학교 시절(졸업은 서울 수송초등학교에서 했다)엔 '세라복'을 입고 KBS 라디오 합창단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금테 안경까지 썼으니 당시로선 여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경기중학교 땐 농구에 미쳤고,경기고에 다니면서 친한 친구들과 밴드도 만들었다.

6남1녀의 다섯 번째 아들이라는 가정 환경도 어린 윤영두로선 새로운 생활을 동경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줬다. 형들이 법조인,기업인으로 집안을 이끈 덕분에 윤 사장의 어깨는 훨씬 가벼웠다.

◆도전을 즐기다

1987년 2월 귀국하면서 윤 사장은 금호실업과 금호타이어의 합병으로 타이어 수출2국 북미과장을 맡았다. 미국 수출이 한창 잘되던 1992년 6월엔 차장을 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97년,외환위기가 찾아왔다. LA 미주법인은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윤 사장은 "외환위기가 터지니까 돈줄이 싹 말라버렸다"고 회고했다. 본사가 보증을 서고,한국의 은행들한테 운영 자금을 조달해 왔는데 서울 본사가 보증해 줄 수 있는 규모가 확 줄면서 해외 현지법인들은 독자 생존을 해야만 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도 화합을 중시하는 그의 성정은 이때도 유감없이 효력을 발휘했다. 법인장이던 윤 사장으로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미국 은행과 거래 관계를 트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평소 알던 지인들을 총동원해 연줄을 구했다. 이때 현지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미국인 친구가 조언을 하나 해줬다. 재고와 매출채권을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선 생소한 금융 기법이었다.

이렇게 해서 뱅크오브뉴욕과 3000만달러 대출 계약을 맺었다. 덕분에 1998년 10월 귀국발령을 받았을 때 당시 부장이던 윤 사장은 임원 직급에 임명돼 있었다.

하지만 귀국과 동시에 윤 사장은 뜻하지 않은 명령을 받게 된다. 1999년 1월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의 노무담당 상무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평사원으로 입사해 가장 단기간에 임원진에 올랐지만 그 기쁨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해외 업무만 주로 하던 그에게 노무담당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상대가 있는 싸움이었고,매번 어려운 협상을 해야 했다.

2003년 1월 금호타이어 구주본부장으로 발령받을 때까지 윤 사장은 까다롭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대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때 익힌 노래가 그의 애창곡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다. 노조원들과 회식을 하고,뒷풀이에서 이 노래를 열창하면 윤 사장은 어느새 그들과 한마음이 됐다고 한다.

◆위기가 기회로

2008년 12월 그는 항공사 최고경영자(CEO)라는 또 하나의 도전을 하게 된다. 제조업에서 일하던 그로선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암호가 난무하는 회의실 분위기부터 '황당함 그 자체'였다. 회장은 'CCC',사장은 'DDP'라고 부르는 등 이름은 모두 생략하고 알파벳 3개짜리 직급으로 모두를 불렀다. 전 세계 공항 이름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익혀야 했다.

게다가 사장에 취임할 무렵 아시아나항공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발 금융 위기에다 2009년엔 신종플루까지 겹쳤다. 임원직 축소를 포함한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해야만 했다.

윤 사장은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에서 노무 담당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왜 이 일을 맡아야 하나"는 생각이 떠나지 않을 정도로 마뜩지 않았던 일이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소중한 자산이 됐다. 윤 사장은 모든 직원들을 만나며 대화를 나눴다. '생존이 중요하다. 회사가 끝까지 책임져 준다'는 믿음을 강하게 심어줬다. 직원들도 신뢰로 화답했다. 2009년 최악의 시기에 아시아나항공 전 직원은 자발적으로 한 달간 무급휴직을 실시했다. 그리고 지난해 아시아나항공은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거뒀다. 2009년 2월 항공업계 최고의 권위지인 ATW로부터 항공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올해의 항공사'상을 받은 데 이어 작년엔 항공전문평가 및 리서치 기관인 영국 스카이트랙스로부터 4년 연속 5성항공사 인증 및 '2010 올해의 항공사'로 선정돼 항공업계의 그랜드슬램을 이뤘다.

◆운 좋은 사나이?

윤 사장은 스스로 "사장이 된 것에 가끔 놀란다"고 얘기한다. 신입사원 때부터 사장이 꿈이었다는 야심가형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자평이다. "매 순간 위기가 닥칠 때 앞서 헤쳐 나갔을 뿐"이라고 했다.

윤 사장의 인생에선 행운도 여러 차례 따랐다. 미국에서만 12년을 보냈고,임원도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달았다. 위기의 아시아나항공에 구원투수로 투입돼 곧바로 '메이저리거'급으로 성장시켰다. 위기가 오히려 경험이자 자산이며 행운으로 돌아왔다.

'운'에 관한 일화 가운데 재미있는 게 하나 있다. 아시아나항공 사장으로 승진한 2008년의 일이다. 5월17일에 윤 사장은 185야드짜리 파3홀에서 5번 아이언으로 홀인원을 했다. 그리곤 11월1일 CEO로 영전했다.

윤 사장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일까. 자신의 오랜 생활 신조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저마다 주어진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늘도 행운을 주지 않겠습니까. "

박동휘/장창민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