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7일 새 내각 구성 이후 처음으로 각료회의를 주재했다. 또 개헌위원회 설립을 승인하고 공직 부패와 선거부정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는 등 추가 개혁안도 내놓았다. '9월까지의 잔여 임기 버티기' 행보에 본격 나선 것이다. 최근 반정부 시위가 소강 상태에 들어가고 이날 130억이집트파운드(2조4091억원) 규모의 단기채권 발행에 성공하면서 정국 주도권 잡기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시위를 주도해온 무슬림형제단은 정부와의 협상 거부 가능성을 경고하는 등 유혈 사태가 재연될 소지도 여전하다. 미국의 일관성 없는 이집트 정책도 사태 재연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무바라크 반격 시작하나

이집트 관영 뉴스통신 메나에 따르면 무바라크는 이날 주재한 전체 각료회의에서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를 규명할 조사위원회를 만들라고 지시하며 잔여 임기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9월 차기 대선 때까지 남은 임기를 채우겠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또 무바라크의 지시에 따라 이집트 검찰은 8일부터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각료 3명과 집권 국민민주당(NDP) 고위 관료 1명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지난해 치러진 총선과 관련한 선거부정 수사도 진행 중이다. NDP는 지난 총선에서 83%의 의석을 차지했지만 선거부정 탓으로 여겨지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반부패 정책과 함께 다양한 유화책을 병행하며 국면 전환에 나섰다. 사미르 라드완 신임 재무장관은 "약 65억이집트파운드(1조2000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4월부터 공공부문 급여를 약 15% 인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오후 7시부터 오전 8시까지인 야간 통금도 8일부터 오후 8시부터 오전 6시까지로 완화했고 증권거래소도 13일 재개장키로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반정부 시위를 이끌어 이집트 민주화의 상징으로까지 떠오른 구글의 이집트인 임원 와엘 그호님도 석방했다.

무바라크의 행보는 정부와 야권 대표자들 간 협상이 진행되는 데다 미국이 이집트의 점진적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7일 기자회견에서 "무바라크는 재출마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임기는 올해로 끝난다"며 "개혁은 점진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다"고 말해 무바라크의 잔여 임기 보장에 힘을 실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도 "무바라크 대통령이 갑자기 물러나면 대선 일정 등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주말 무바라크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던 것과는 상반된 행보다.

◆구심점 못 찾는 야권

이집트 야권이 구심점을 찾지 못할 경우 정국 주도권 싸움에서 무바라크에게 밀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집트 정부는 최근 최대 야권 조직인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재야단체 대표자들과 만나 개헌 위원회 구성과 비상계엄 해제,정치범 석방,언론자유 보장 등 개혁을 추진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야권 일부는 선전전이라며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협상에 참가한 무슬림형제단 관계자는 "일부 요구사항은 충족됐지만 무바라크의 퇴진 요구에는 반응이 없다"며 "협상 지속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협상 중단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4 · 6청년운동' 등을 비롯해 카이로 알 타흐리르 광장을 점거 중인 수천명의 시위대는 재야단체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4 · 6청년운동 관계자는 "무바라크 퇴진 전에는 정부와 대화는 없다"고 못박았다.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된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도 이날 미국 NBC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무바라크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재차 촉구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에 따르면 지난 2주간 이집트에선 최소 297명이 사망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