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의 버블이 무너져 내리던 1996년.이코노미스트 미즈타니 겐지는 '우하향 곡선을 그리는 일본 경제'라는 책을 통해 일본 경제가 변곡점을 지나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고 단언했다. 경기 침체가 장기간 이어질 것이고,재정지출을 늘려도 부양효과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해 경기 회복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버블경제기의 고도성장 자체가 정상적 현상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균형 재정을 확립하는 것만이 경제 정상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재정지출을 최대한 억제하고 당시 3%이던 소비세(부가가치세에 해당)를 20% 수준으로 대폭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까지 펼쳤다. 재정개혁의 시급성을 주장한 사람은 그 외에도 적지가 않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경기 부양을 명분으로 국채를 대거 발행하며 필요치도 않은 도로를 무더기로 건설하는 등 공공 투자를 크게 늘렸다. 경기 침체가 이어질 경우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할 것을 염려한 탓이다. 국민에게 직접 현금을 뿌리는 선심 정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부치 내각은 1999년 저소득층 3500만세대에 7000억엔에 달하는 상품권을 지급했고,2009년 아소 내각은 2조엔 규모의 현금을 전 국민에게 나눠줬다. 그야말로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현 민주당 정권 또한 자녀 보육수당,고교 교육 무상화,고속도로 통행 무료화 등 무상복지 정책을 쏟아낸 것은 마찬가지다.

재정이 악화되고 국가부채가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국가부채는 오는 3월 말 943조엔을 기록,국내총생산(GDP) 대비 200%에 달하고 내년 회계연도 말엔 1000조엔에 이를 전망이다. 부채비율이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129%)나 이탈리아(104%)를 훨씬 웃돌 정도로 원리금 상환 부담이 크다. 금리가 상승 추세를 보인다면 부담은 더 가중된다.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한 것도 그런 연장선상의 일임은 물론이다.

일본 정부가 재정 악화의 심각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1990년 60%대였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1995년 80%대 초반까지 상승하자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적이 있다. 1996년판 경제백서는 '2020년까지 125% 이하로' 이 비율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재정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벌써 200%까지 솟구쳤으니 정부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속도로 재정 상태가 악화되고 있음이 한눈에 드러난다.

이는 정치인들이 소비세 인상을 차일피일 미뤄온 탓도 대단히 크다. 일본 정치인들은 소비세 인상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1997년 하시모토 총리가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올린 뒤 총선에서 참패하는 등 조세저항이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간 나오토 총리도 소비세를 10%로 인상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지만 지난해 참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추진력이 많이 약화됐다. 재정개혁이 시급한 만큼 정치 생명을 걸고라도 국민을 설득하는 정치인이 많아야 하지만 그런 사명감으로 무장한 인물은 찾기가 쉽지 않다. 소비세를 10%로 올려도 균형 재정은 요원한 게 현실이고 보면 참으로 딱하다.

하지만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우리 사정이 일본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결코 안심할 수준은 못 된다. 공식적 국가부채가 GDP 대비 30%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공기업 부채 등 사실상 국가가 책임져야 할 몫을 모두 합하면 선진국 못지않은 수준으로 높아진다는 지적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재원 조달 방안은 도외시한 채 무상급식이다 무상의료다 무상보육이다 하며 인기영합 정책만 양산해서는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특히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 대선을 앞두고 포퓰리즘이 한층 기승을 부릴 상황이어서 더 걱정이 크다. 정치권은 일본의 사례를 직시하고,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

이봉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