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떼려야 뗄 수 없는, 만날 싸우고 또 풀고… 발레는 엄마같은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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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수석발레리나 김지영 씨
열살 때 엄마 졸라 교습소로…"잘하네" 한마디에 목숨 걸기로
중2때 러 바가노바아카데미 입학…발레엔 지름길 없다는 것 배웠죠"
열살 때 엄마 졸라 교습소로…"잘하네" 한마디에 목숨 걸기로
중2때 러 바가노바아카데미 입학…발레엔 지름길 없다는 것 배웠죠"
예술의전당에 있는 국립발레단 연습실.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듯 날렵한 점프.그러나 걸음을 옮길 땐 전혀 딴판이다. 발목을 구부리지 못해 어기적거린다. 양쪽 토슈즈 속의 발가락은 짓무른 지 오래.반창고를 덧붙였지만 걸을 때마다 쓰리고 아프다.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발레리나(33).국립발레단이 9년 만에 무대에 올리는 '지젤'의 주역.오전 10시부터 시작한 연습이 오후 6시를 넘어서도 끝날 줄 모른다. 그의 몸짓이 느려지는 순간에도 표정은 싱그럽다. 프랑스국립발레단의 안무가 비비안 데쿠튀르가 "비엥 쉬흐(Bien sur · 좋아요)!"를 연발하자 그의 얼굴이 더 환해진다.
발레리나가 작품에 몰입할 때의 느낌은 어떤 걸까. 그는 "만날 그럴 수는 없지만 가끔 몰입할 땐 마치 색다른 공기를 마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큼한 공기,시원한 바다나 아무도 없는 산 속의 때묻지 않은 청정한 공기,태초에나 있을 것 같은 바람,그런 냄새를 맡는다고나 할까요. "
멋쩍어 하며 웃는 모습이 상큼하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털털한 스타일.그러나 발레에 대해서만은 누구보다 억척스러운 '또순이'다. 연습할 때마다 내일 그만둘 각오로 덤빈다.
그는 열 살 때까지 발레를 듣도 보도 못했다고 했다. "집안에 예술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엄마가 저를 가졌을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영국 로열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봤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사람들이 '뱃속에서부터 보고 나와서 발레리나가 됐나 보다'며 놀리곤 해요. 그런데 엄마는 제게 발레를 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반대했죠.몸이 아주 약했거든요. 서른 여섯에 낳은 막둥이였는데 너무 안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말랐으니까….그럴 만도 했죠."
허약한 탓에 소심하고 신경질적이었던 소녀는 '권법소년'이라는 만화 속 '딸기'란 아이에게 반해 태권도 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몸이 튼튼해지지도 않고 성격이 활달해지지도 않았다. 재능 역시 없어 노란띠도 못 땄다. 흔히 하는 피아노도 시큰둥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발레에 확 꽂혔어요. 엄마에게 졸랐지만 들은 척도 안 했어요. 할 수 없이 전화번호책을 뒤져 무용학원마다 전화해 거기에서 발레도 가르치느냐고 물어보기 시작했죠.그걸 보고 엄마가 마음을 바꿨대요. "
그는 엄마 손을 잡고 서울 역삼동의 한 카센터 2층에 있는 학원에 가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같은 고무바닥이 아니라 마룻바닥이어서 발바닥에 가시가 자꾸 박히는데 애들이 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쉬워보일 수 없었어요. 전 그냥 쉽게 따라했죠.그러자 선생님이 '어머 너 진짜 잘 따라하는구나. 천재인가봐'라며 칭찬을 해주셨어요. 약하고 빼빼 마른 아이가 신이 나서 날아갈 것 같더라니까요.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인정받았다는 느낌이었죠.그때부터 목숨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엄마들은 발레학원에 데리러 오고 그러는데 전 혼자 다녔어요. 버스 타려면 어두운 골목을 지나야 해서 좀 무서웠지만 학교 끝나고 7시에 가서 9시에 돌아오는 걸 계속했죠.그때 시내버스가 239-1,78-1번이었던 것도 기억나요. 그만큼 절실했죠."
그러던 어느 날 자극제가 생겼다. 다른 학원에서 배우던 학생이 중급반에 왔는데 알고 보니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다. "신체조건이 발레하기에 너무 좋은 애였어요. 전 초급반이었는데 중급반에 있는 그 아이를 보고 크게 자극 받았죠.깡마른 제 몸하고 비교하면서 말이죠.6학년 때 콩쿠르에 처음 나갔는데 그 친구가 대상을 탔고 전 장려상에 그쳤어요. 크게 충격을 받았지요.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고….물론 나중엔 예원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예원중학교에 장학생으로 둘이 같이 들어갔어요. 그 친구는 강단 있고,긴장을 안 하는 편이었지만 전 늘 긴장했었죠."
학원에서 받은 자극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큰 시야를 갖도록 해준 것이다. "어릴 때부터 유학했던 언니들이 학원에 자주 드나들며 '너네 유학 가야 돼'라고 했는데 저도 6학년 때 발레 유학을 목표로 세웠어요. 예원중학교에 가서는 방학 때마다 선생님과 뉴욕에 연수 가서 레슨도 받았죠.중1 겨울에는 방한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가노바발레아카데미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때 꼭 바가노바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중2 겨울에 바가노바로 연수 겸 오디션을 보러 가 드디어 입학하게 됐죠.외국인은 16~18세만 받는 게 학교 방침이었는데 저는 14세였어요. 5학년에 들어갔는데 텃세는 없더라고요. "
거기에서 그는 또 한번 훌쩍 컸다. " 진짜 기초를 배웠어요.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차근차근 다듬어야 무대에서 정확성과 우아함이 나오는 거잖아요. 몇 바퀴 더 돌고 이게 문제가 아니죠.그래서 발레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
얼마 뒤 그는 또다른 시련을 겪었다. 졸업공연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예정돼 있던 러시아 발레단 입단을 취소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다섯 달 넘게 폐인으로 지냈다. 그러다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을 만나 입단했다. 최연소라고 했다.
"해설이 있는 발레의 주역을 맡겨주셨어요.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줄거야'라며 독하게 마음 먹고 바가노바에서 배운 모든 걸 내뿜었죠.얼마 후 첫 정기공연 '노트르담의 꼽추'에서도 주역으로 발탁됐어요. 첫 번째 공연 주역은 강수진 언니였고 전 세 번째 공연 주역으로 섰죠.그 무렵 김주원 김용걸 이원국 등 '발레에 미친' 사람들이 다 들어오면서 국립발레단의 르네상스가 왔다고들 하더라고요. 단장님이 몬테카를로에서 좋은 작품도 가져오고 저도 콩쿠르 많이 나가면서 유럽 발레에 눈을 뜨게 됐죠.그런데 5년째 되던 해 김용걸 선배가 나가고 고정 파트너가 없어 힘들어졌어요. 콩쿠르에서 상도 탔지만 유럽 사람들은 한국을 너무도 몰라줬죠.내 자료를 보지도 않고 폐기하더군요. 그래서 냅다 사표부터 쓰고 비행기를 탔죠."
영국 국립발레단은 유럽인이 아니면 어렵다 하고 스위스에서는 빈 자리가 없다고 퇴짜 맞고….그러다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을 찾아갔다. "오디션 보는 애들이 너무 많고 자리도 없다며 '내일 오라'고 하기에 다음 날 한국에 가야 한다고 우겨서 겨우 오디션 받았죠.유심히 보던 단장이 '괜찮다'면서 수석무용수 계약은 할 수 없고 그 아랫자리를 주겠다고 했어요. 알고 보니 단장이 그 유명한 웨인 이글링이었어요. 진짜 유명한 사람이었죠."
네덜란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던 중 쿠바 페스티벌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를로스 아코스타와 '돈키호테'를 공연하기로 했는데 너무 의욕이 앞서 혼자 연습하다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목발을 짚고 5~6개월을 지냈다. "수술하고 몇 달 쉰 뒤 다시 처음부터 '재활'을 했죠.네덜란드에서 활동한 지 8년째에 최 단장이 한국에 오라고 해서 고민하던 중 집에 도둑이 들어 혼이 났는데 잘 됐다 싶어서 귀국했어요. "
발레라면 이토록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에게 발레가 무엇인지 물었다. "발레가 너무나 좋지만 사실 좋아한다는 말은 아껴요. 발레는 엄마 같은 존재죠.떼려야 뗄 수 없는,맨날 싸우는 존재,외로움을 풀어주는 존재."
만난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발레리나(33).국립발레단이 9년 만에 무대에 올리는 '지젤'의 주역.오전 10시부터 시작한 연습이 오후 6시를 넘어서도 끝날 줄 모른다. 그의 몸짓이 느려지는 순간에도 표정은 싱그럽다. 프랑스국립발레단의 안무가 비비안 데쿠튀르가 "비엥 쉬흐(Bien sur · 좋아요)!"를 연발하자 그의 얼굴이 더 환해진다.
발레리나가 작품에 몰입할 때의 느낌은 어떤 걸까. 그는 "만날 그럴 수는 없지만 가끔 몰입할 땐 마치 색다른 공기를 마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큼한 공기,시원한 바다나 아무도 없는 산 속의 때묻지 않은 청정한 공기,태초에나 있을 것 같은 바람,그런 냄새를 맡는다고나 할까요. "
멋쩍어 하며 웃는 모습이 상큼하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털털한 스타일.그러나 발레에 대해서만은 누구보다 억척스러운 '또순이'다. 연습할 때마다 내일 그만둘 각오로 덤빈다.
그는 열 살 때까지 발레를 듣도 보도 못했다고 했다. "집안에 예술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엄마가 저를 가졌을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영국 로열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봤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사람들이 '뱃속에서부터 보고 나와서 발레리나가 됐나 보다'며 놀리곤 해요. 그런데 엄마는 제게 발레를 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반대했죠.몸이 아주 약했거든요. 서른 여섯에 낳은 막둥이였는데 너무 안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말랐으니까….그럴 만도 했죠."
허약한 탓에 소심하고 신경질적이었던 소녀는 '권법소년'이라는 만화 속 '딸기'란 아이에게 반해 태권도 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몸이 튼튼해지지도 않고 성격이 활달해지지도 않았다. 재능 역시 없어 노란띠도 못 땄다. 흔히 하는 피아노도 시큰둥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발레에 확 꽂혔어요. 엄마에게 졸랐지만 들은 척도 안 했어요. 할 수 없이 전화번호책을 뒤져 무용학원마다 전화해 거기에서 발레도 가르치느냐고 물어보기 시작했죠.그걸 보고 엄마가 마음을 바꿨대요. "
그는 엄마 손을 잡고 서울 역삼동의 한 카센터 2층에 있는 학원에 가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같은 고무바닥이 아니라 마룻바닥이어서 발바닥에 가시가 자꾸 박히는데 애들이 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쉬워보일 수 없었어요. 전 그냥 쉽게 따라했죠.그러자 선생님이 '어머 너 진짜 잘 따라하는구나. 천재인가봐'라며 칭찬을 해주셨어요. 약하고 빼빼 마른 아이가 신이 나서 날아갈 것 같더라니까요.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인정받았다는 느낌이었죠.그때부터 목숨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엄마들은 발레학원에 데리러 오고 그러는데 전 혼자 다녔어요. 버스 타려면 어두운 골목을 지나야 해서 좀 무서웠지만 학교 끝나고 7시에 가서 9시에 돌아오는 걸 계속했죠.그때 시내버스가 239-1,78-1번이었던 것도 기억나요. 그만큼 절실했죠."
그러던 어느 날 자극제가 생겼다. 다른 학원에서 배우던 학생이 중급반에 왔는데 알고 보니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다. "신체조건이 발레하기에 너무 좋은 애였어요. 전 초급반이었는데 중급반에 있는 그 아이를 보고 크게 자극 받았죠.깡마른 제 몸하고 비교하면서 말이죠.6학년 때 콩쿠르에 처음 나갔는데 그 친구가 대상을 탔고 전 장려상에 그쳤어요. 크게 충격을 받았지요.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고….물론 나중엔 예원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예원중학교에 장학생으로 둘이 같이 들어갔어요. 그 친구는 강단 있고,긴장을 안 하는 편이었지만 전 늘 긴장했었죠."
학원에서 받은 자극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큰 시야를 갖도록 해준 것이다. "어릴 때부터 유학했던 언니들이 학원에 자주 드나들며 '너네 유학 가야 돼'라고 했는데 저도 6학년 때 발레 유학을 목표로 세웠어요. 예원중학교에 가서는 방학 때마다 선생님과 뉴욕에 연수 가서 레슨도 받았죠.중1 겨울에는 방한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가노바발레아카데미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때 꼭 바가노바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중2 겨울에 바가노바로 연수 겸 오디션을 보러 가 드디어 입학하게 됐죠.외국인은 16~18세만 받는 게 학교 방침이었는데 저는 14세였어요. 5학년에 들어갔는데 텃세는 없더라고요. "
거기에서 그는 또 한번 훌쩍 컸다. " 진짜 기초를 배웠어요.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차근차근 다듬어야 무대에서 정확성과 우아함이 나오는 거잖아요. 몇 바퀴 더 돌고 이게 문제가 아니죠.그래서 발레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
얼마 뒤 그는 또다른 시련을 겪었다. 졸업공연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예정돼 있던 러시아 발레단 입단을 취소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다섯 달 넘게 폐인으로 지냈다. 그러다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을 만나 입단했다. 최연소라고 했다.
"해설이 있는 발레의 주역을 맡겨주셨어요.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줄거야'라며 독하게 마음 먹고 바가노바에서 배운 모든 걸 내뿜었죠.얼마 후 첫 정기공연 '노트르담의 꼽추'에서도 주역으로 발탁됐어요. 첫 번째 공연 주역은 강수진 언니였고 전 세 번째 공연 주역으로 섰죠.그 무렵 김주원 김용걸 이원국 등 '발레에 미친' 사람들이 다 들어오면서 국립발레단의 르네상스가 왔다고들 하더라고요. 단장님이 몬테카를로에서 좋은 작품도 가져오고 저도 콩쿠르 많이 나가면서 유럽 발레에 눈을 뜨게 됐죠.그런데 5년째 되던 해 김용걸 선배가 나가고 고정 파트너가 없어 힘들어졌어요. 콩쿠르에서 상도 탔지만 유럽 사람들은 한국을 너무도 몰라줬죠.내 자료를 보지도 않고 폐기하더군요. 그래서 냅다 사표부터 쓰고 비행기를 탔죠."
영국 국립발레단은 유럽인이 아니면 어렵다 하고 스위스에서는 빈 자리가 없다고 퇴짜 맞고….그러다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을 찾아갔다. "오디션 보는 애들이 너무 많고 자리도 없다며 '내일 오라'고 하기에 다음 날 한국에 가야 한다고 우겨서 겨우 오디션 받았죠.유심히 보던 단장이 '괜찮다'면서 수석무용수 계약은 할 수 없고 그 아랫자리를 주겠다고 했어요. 알고 보니 단장이 그 유명한 웨인 이글링이었어요. 진짜 유명한 사람이었죠."
네덜란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던 중 쿠바 페스티벌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를로스 아코스타와 '돈키호테'를 공연하기로 했는데 너무 의욕이 앞서 혼자 연습하다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목발을 짚고 5~6개월을 지냈다. "수술하고 몇 달 쉰 뒤 다시 처음부터 '재활'을 했죠.네덜란드에서 활동한 지 8년째에 최 단장이 한국에 오라고 해서 고민하던 중 집에 도둑이 들어 혼이 났는데 잘 됐다 싶어서 귀국했어요. "
발레라면 이토록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에게 발레가 무엇인지 물었다. "발레가 너무나 좋지만 사실 좋아한다는 말은 아껴요. 발레는 엄마 같은 존재죠.떼려야 뗄 수 없는,맨날 싸우는 존재,외로움을 풀어주는 존재."
만난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