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논란이 돼 온 용어로 '국부 유출'이라는 것이 있다. 엄연한 현실을 묘사하는 용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세계화 시대를 맞아 촌스러운 국수주의자의 용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경제학의 창건자 애덤 스미스의 저서가 《국부론》인 데서 보는 것처럼 '국부'라는 용어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유출(outflow)은 유입(inflow)과 함께 경제의 흐름을 표시하는 말로 역시 이상할 것이 없는 용어다.

문제는 둘이 합친 '국부 유출'이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일 것이다. 이런 용어와 가장 확실하게 맞는 것은 과거 식민지 시대처럼 한 나라의 자산을 외국인이 무상으로 들고 나가는 것이다. 현대 경제에서는 그런 일은 없지만 비슷한 일은 있을 수 있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 나가면 국부유출인 것이다. 그리고 자산에는 배당 이자 지대 같은 소득이 붙게 마련이다. 이런 것을 챙겨 나가면 그것도 한국인의 국민소득을 낮추게 된다. 소득과 부는 다르지만,소득을 낳는 것이 부이기 때문에 둘은 표리관계에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발발 직후 대규모 자산을 외국인에게 투매(fire-sale)했다. 그 후에도 국내자본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많은 자산이 외국인에게 헐값으로 넘어갔다. 그 뒤 경제 회복과 구조조정으로 자산가격이 상승하고 환율까지 내리자 외자는 어마어마한 차익을 얻었다. 거기에다 물론 배당 이자 지대도 챙겼다.

한국도 해외투자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은 외자만큼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더욱이 한국 해외투자의 절반은 외화준비금이다. 그 이유는 위기 후 단기자본시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외화준비금은 자산가격이 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금리도 형편없이 낮다.

이렇게 위기 후 외국인이 대한(對韓) 투자에서 거둔 이익은 한국인이 해외투자에서 거둔 이익보다 훨씬 클 가능성이 많다. 그 차이가 얼마쯤 될까. 위기가 일어난 1997년 3분기부터 자료가 있는 2010년 3분기까지 최소 2806억달러가 된다.

물론 외화준비금 중에는 한국이 단기자본시장을 개방하지 않았어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분량이 있다. 이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차이는 줄잡아도 2000억달러에 달한다. 현재 가격으로는 2400억달러 정도다. 연간으로 따지면 1997년 이후 평균 국내 총생산의 2.5%다.

이것이 1997년 위기 이후 한국이 치른 '국부 유출' 액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유출' 액이 되려면 실제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여기서 통계의 맹점 중 하나가 배당이나 이자를 받아서 나가는 것은 국민소득 계산에 잡히지만,차익을 남겨서 나가는 것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처럼 외국인 자신이 투매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예외적 사건일 뿐,대부분의 경우 외국인은 의도대로 차익을 실현해서 나가고 있다. 2008년 위기의 경우에도 그 훨씬 전인 2006년부터 차익을 실현해서 빼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2400억달러는 그 모두가 국민소득 계산에 잡히지도 않고 당장 실현되지도 않지만 한국인의 국민소득을 낮출 수밖에 없는 잠재적 '국부 유출' 액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매년 최소 국내총생산의 2.5%가 될지는 몰라도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 와서 별 수가 없더라도 한국인이 알고는 있어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1997년 위기가 한국전쟁 후 최대 국난이라고 하면서도 백서 하나 없는 실정이지만 알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인이 외국인 동향에 따라 춤추는 주가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는 사이에 '국부 유출'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민 < 연세대 경제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