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를 절단당하는 궁형(宮刑)의 치욕을 견디고 인간학의 교과서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그는 기원전 145년께 태어나 90년께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한 무제 때 태사령(太史令)으로서 천문학과 주역(周易)에 정통했다.

이런 배경에서 자란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가학을 익히고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와서 당시 경학대사인 동중서(董仲舒)와 공안국(孔安國)에게 고문을 배우기도 했다. 스무 살 때 여행을 시작해 중국 전역을 두루 다녔으며 돌아온 후에는 낭중(郎中)에 올랐다. 이후 무제를 따라 순행하면서 온 나라를 주유했다. 어디를 가든지 고적을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현장 감각을 익혔다.

그런 그가 낙양(洛陽)에서 아버지와 만났을 때,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역사서를 집필하라는 당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사마천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의 장서를 정리하고 집필 관련 자료도 수집하면서 4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40세쯤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집필 방향이 바뀌게 된다. 기원전 99년 전한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사마천은 절대 군주 한 무제 앞에 나아가 친구 이릉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는 현실세계의 냉혹함에 눈을 뜨고 자신의 뜻과 달리 돌아가는 세태를 보고 한동안 절망과 고뇌의 세월을 보냈다. 몇 년 뒤인 기원전 93년쯤 반란 사건에 연루돼 형 집행 날짜를 받고 투옥돼 있는 임안(任安)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껴 쓴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란 글에서 그는 19번이나 '치욕(辱)'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저는 분노를 주변 사람에 알려줄 수도 없게 되었으니,영원히 가는 것은 혼백(魂魄)이고 사사로운 원한은 끝이 없다"고 참담한 어조로 서두를 열면서 자신을 땅강아지나 개미와 같은 하찮은 미물에 비유했다. 또 "스스로 말을 잘못해 이런 화를 만나 향리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돌아가신 아버지를 욕되게 했으니 이 더러운 치욕은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끊어지는 듯하고,집안에 있으면 갑자기 망연자실하고 집밖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줄기에 땀이 흘러 옷을 적시지 않는 적이 없다"며 한스러워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고통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았다. 《사기》 전편에서는 인간학의 교과서로 불릴 만큼 수많은 인물군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이 책에서 냉정한 역사의 거울로 인물을 재단하거나 서릿발 같은 말로 단죄하는가 하면 때로는 감성적인 언어로 인물을 감싸며 인간 그 자체를 탐색해 나간다.

그는 천도시비(天道是非),즉 하늘의 도리가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다. 치열하게 살다 간 인물들의 실패와 성공,좌절과 재기를 다룬 그의 의도는 자객과 상인,모사가,골계가,풍자가 등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뻔한 인물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면서 승자와 패자가 공존한다는 사실,더 나아가 성공과 실패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의 삶은 거칠고 메마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궁형을 받은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역사 속에서 재기했듯이,우리도 승자와 패자,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양자 사이의 경계에서 진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성공한 사람들은 좀 더 겸허해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발분해 노력하면서 통찰의 지혜를 터득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