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 기행] 영국의 자연을 너무 사랑한 '바보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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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컨스터블 '솔즈베리 대성당'
조국보다 佛서 더 인정…"외국의 부자가 되느니 영국의 貧者가 되겠다"
"상상속의 풍경은 결코 실제보다 뛰어날 수 없어"
123m 첨탑 아래 풀뜯는 소, 이상화된 자연묘사 전통 깨
조국보다 佛서 더 인정…"외국의 부자가 되느니 영국의 貧者가 되겠다"
"상상속의 풍경은 결코 실제보다 뛰어날 수 없어"
123m 첨탑 아래 풀뜯는 소, 이상화된 자연묘사 전통 깨
수많은 재산도 마다하고 화가가 되겠다던 바보스런 천재가 있었다. 존 컨스터블(1776~1837)이라는 이 화가는 서포크 지방의 부유한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났다. 둘째 아들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해 아버지는 가업인 옥수수 판매업과 제분업 운영권을 그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컨스터블도 아버지의 의향을 좇아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옥수수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사춘기 때부터 품어온 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냥 취미 삼아 서포크 일대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던 게 그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 그는 시골길 사이로 흐르는 시내와 오래된 판잣집,물레방아,버드나무가 자아내는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무엇보다도 변화무쌍하게 표정을 바꾸는 하늘의 경치에 매료됐다.
아버지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목에 풀칠하기도 힘든 화가가 된다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도 풍경화가가 되겠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영국에서 풍경화는 가장 저급한 화가들이나 손대는 장르쯤으로 여겨졌고 괄시의 대상이었다. 주변에서도 극구 만류했다. 한번은 미들섹스에 사는 친척을 방문했다가 존 토머스 스미스라는 직업 화가를 소개받았는데 그 역시 컨스터블에게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이 우직한 천재 화가의 고집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아버지를 설득해 로열아카데미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화가의 길로 나선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 딱한 로맨티스트 아들에게 약간의 연금을 주기로 약속한다.
그를 이해해준 것은 소꿉친구 마리아뿐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며 사랑을 키워온 마리아는 그의 모든 결정을 존중했다. 둘이 결혼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마리아의 가족은 이 아름다운 결합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교구 사제였던 마리아의 할아버지는 컨스터블의 낮은 신분을 문제 삼았고 재산을 한푼도 나눠주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소송대리인이었던 아버지의 입장도 단호했다. 마리아는 "차라리 무일푼으로 결혼할지언정 그의 화가의 길을 막을 순 없어요"라고 선언하고는 가난한 화가의 아내가 된다. 이 가슴 뭉클한 순애보의 주인공은 이때부터 마흔 한 살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이라는 또 하나의 동반자를 떨쳐내지는 못했다.
컨스터블의 풍경화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당시 아카데미 화가들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리지 않고 니콜라 푸생을 본받아 자연을 이상화했는데 그는 "상상 속의 풍경은 결코 실제의 풍경에 근거한 작품보다 뛰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야외에 나가 자연을 치밀하게 관찰한 후 화폭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하늘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에 주목한 루이스달 등 네덜란드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네덜란드 화가들이 현장에서 스케치만 한 데 비해 야외에서 채색까지 병행하는 '오일 스케치'로 현장의 느낌까지 담았고 이를 바탕으로 아틀리에에서 완성본을 제작했다. 이런 작업 태도는 후일 인상주의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야외에서 작품을 완성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실제의 풍경을 중시한 만큼 그는 가까운 대상은 갈색조로,먼 배경은 푸른색 톤으로 표현하는 관례를 거부하고 초록으로 충만한 실제의 색채를 그대로 재현했고 화면에 흰색 점을 추가해 밝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솔즈베리 대성당'은 그의 이러한 태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20년께 솔즈베리 주교인 존 피셔의 주문으로 제작한 것인데 완성본에 앞서 미리 만든 오일 스케치 중 하나다. 영국 남서부에 자리한 소도시 솔즈베리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유서 깊은 도시로 이곳의 랜드마크인 대성당은 영국에서 가장 높은 123m의 첨탑으로 유명하다.
그림을 보면 전면에 훤칠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좌우로 시원스레 자리하고 있고 그 사이로 드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성당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성당 앞 나무 사이의 목초지와 냇가에는 소들이 풀을 뜯거나 물을 마시고 있어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전통적인 풍경화가였다면 성당 앞에 이런 장면을 덧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왼쪽 하단에는 숲을 산책하는 주교 내외(영국 성공회는 사제의 혼인을 인정한다)를 묘사했는데 주교는 오른손의 지팡이로 성당을 가리키고 있다. 이 작품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빛나는 색채 구사에 있다. 그는 초록의 느낌을 박진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녹색과 붉은색을 병치했고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시냇물의 표면을 묘사하기 위해 수면에 흰색 점들을 삽입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첫 완성작에 주교는 보기 좋게 퇴짜를 놓았다. 하늘이 너무 칙칙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컨스터블은 1826년 하늘을 산뜻한 색채로 바꿔 주교의 속된 기준을 만족시켜야만 했다. 그의 새로운 시도들은 당대 영국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울 만큼 앞서간 것이었다.
살아생전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던 이 불운한 천재는 70평생 동안 영국에서 겨우 20여점의 작품을 팔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진가를 알아본 프랑스에서는 짧은 기간에 그보다 훨씬 많은 그림을 팔았다. 그래서 한 프랑스 화상이 해외 활동을 권유했지만 그는 "외국의 부자가 되느니 차라리 영국의 가난뱅이가 되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영국의 자연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직한 방앗간집 아들은 끝내 바보처럼 살았지만 그는 오늘날 영국 최고의 자랑이 됐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