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業…2세가 뛴다] (12) 태양프라스틱‥이론 앞세운 아들 "어머니 현장경영이 옳았어요"
"남편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죠.집에서 살림만하던 주부가 회사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과정을 이겨냈는지 알 수가 없어요. "

자동차 시트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부품을 생산하는 태양프라스틱의 김정애 대표(58)는 "장례식장에서 제 얼굴만 처다보고 있는 직원들을 보면서 '이젠 이들의 누나로,엄마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했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딴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남편이 사망한 1997년 12월부터 회사 경영을 맡았다. 이때부터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밤샘한 직원들을 살피는 '어머니' 역할을 해오고 있다. 남편의 사망은 섬섬옥수였던 그의 손을 기름때가 낀 볼품없는 손으로 만들었다.

1남1녀 중 가업을 잇고 있는 아들 김기영 이사(33)는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문닫을 줄 알았는데 회사를 키운 어머니가 존경스럽다"고 어머니 두 손을 꼭 잡았다. 김 이사는 "어머니 손을 잡기는 처음"이라며 멋쩍어했다.

◆밤낮없이 뛰다 간암 걸린 창업주


오퍼상을 하던 창업주 고(故) 김은재 대표는 1980년 지인과 서울 성수동에서 플라스틱 사출업체를 차렸다. 그는 1982년 독립했다. 부천에 100㎡ 남짓한 허름한 공장을 임대해 사출기 3대를 들여놓고 별도 회사를 세운 것.이때부터 자동차시트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사출부품을 만들어 완성차 업체의 밴더들에 납품했다. 국내 자동차 판매 증가로 늘어난 수주물량을 맞추기 위해 2년 뒤 인천 간석동에 임대공장을 두 배로 키워 옮겼다. 김정애 대표는 "이때 남편은 새벽 3,4시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인 뒤 옷만 갈아입고 나갔을 정도로 바빴다"고 회상했다.

수주물량이 늘어나자 창업주는 1992년 약 8억원을 빚내 인천 남동공단에 공장부지(990㎡)를 매입하고 자가공장을 마련했다. 직원도 20여명으로 늘리고 매출액도 10억원 가까이 올리며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창업주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1997년 6월 병원에서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6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은행 빚 7억원과 공장식구들이 전부였다.

◆살림만 하다 경영일선 나선 주부

아버지 사망 1년 뒤 입대한 김 이사는 "제대하고 나면 회사가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런데 여전히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다.

남편의 사망은 김 대표의 어깨를 짓눌렀다. 긴 간병에 건강이 나빠진 김 대표는 남편 사망 후 혼절해 입원까지 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대로 병원에 누워있을 수만 없었다. 회사로 나갔지만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김 대표는 "직원들에게 무조건 열심히 할테니 떠나지 말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고 설명했다. 출근하자마자 생산현장에서 제품 만드는 과정을 배우며 서류를 작성하고 읽는 방법도 하나둘 익혀나갔다. 김 대표는 "서투르고 힘에 부쳤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며 "회사부터 살려야 했기에 살림은 손을 놓다시피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외환위기 여파로 주납품처인 대우자동차(현 지엠코리아)가 부도를 내면서 매출이 절반(약 5억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김 대표는 "이때 2년 남짓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1주일씩 쉬는 순환휴직을 해가며 근근이 버텼다"고 말했다.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고 신차 출시 확대로 수주물량이 늘어 2002년 30억원의 매출을 넘겼다. 김 대표는 매년 수주물량이 늘자 2005년엔 30억원을 들여 남동공단 내에서 공장을 확장 이전했다. 자동차부품에서 공기청정기 냉각탑 등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부품을 만드는 등 생산품목도 늘려나갔다. 연간 생산하는 품목 수만 1000여개.지난해엔 군산에 있는 3300㎡ 규모의 공장을 10억원을 들여 인수했다. 김 대표는 "올해는 지난해 매출 81억원보다 많은 100억원은 무난히 돌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론과 경험 놓고 부딪치는 모자(母子)

김 이사는 2001년 말 제대 후 투박해진 어머니 손을 보고 짐을 덜어들이기 위해서라도 가업을 잇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인천대(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3년간 자동차부품 업체에서 품질관리 경험을 쌓고 2006년 입사,어머니의 짐을 덜어주는 든든한 파트너가 됐다. 입사하자마자 김 이사는 회사의 대외평가를 높이기 위해 각종 인증부터 받아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런 아들의 행동이 마뜩지 않았다. 현장에서 부대끼며 경험을 쌓아야지 서류만 만져서는 안 된다며 아들을 현장으로 내몰았다. 김 이사는 "지난해 그만뒀던 베테랑 직원 3명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도 현장에서 직원들과 부대낀 덕이었다"며 "어머니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최근엔 급여지급 방식을 놓고 모자 간 논쟁 중이다. 열심히 일한 직원에겐 '통큰' 임금인상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게 김 이사의 입장이다. 반면 김 대표는 차별보상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앞으로 모자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회사를 키워나갈지 지켜볼 만하다.

인천=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