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난 중년의 사내가 능숙하게 저녁상을 차린다. 칼로 천천히 고기를 썰어 입에 넣고 씹는다. 식탁 반대편에 아들이 와서 앉는다. 석 달 전 아내 제삿날 이후 처음으로 함께 먹는 저녁밥.아버지가 입을 연다. "나,너한테 보여줄 사람이 있다. " 아버지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들은 아들은 기뻐한다. 자신이 아버지의 짐이 되기는 싫었다면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아들의 방백.

"적막했죠.둘이라는 것이 어쩌면 혼자보다 더 적막한 것 같아요. 한쪽이 입을 다물면 혼자나 둘이나 마찬가지죠.중요한 건 적막하게 살아가는 내가 아니라 상대를 계속 봐야 한다는 거지요. "

그리고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아버지는 결혼할 여자,새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알 수 없는 긴장감 속에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식사를 시작한다.

극은 시작부터 끝까지 방백과 대화를 끊임없이 교차시킨다. 말하고 있는 대상과 듣고 있는 대상이 수시로 변한다. 식탁에 앉은 채 대사만으로 15년의 시간을 오간다.

관객은 혼란스럽다. 세 주인공이 어디까지 알고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 머릿속은 퍼즐을 맞추느라 숨이 차다. '겉으로 내뱉는 말보다 속에서 더 많은 말들을 쏟아내는 대화'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관객들은 대사 속에서 생략된 단어들을 부지런히 찾는다.

이런 관객들을 놀리듯 배우의 몸짓은 여전히 느려터지고,관객은 오히려 바짝 긴장한다. 와인을 따르는 손,화장을 고치는 눈썹,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눈동자 하나까지 어떤 효과음도 없이 배우의 작은 떨림만으로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오는 27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3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