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한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68)가 퇴진 위기를 맞았다. 엿새 동안 리비아 제2 도시 벵가지를 비롯한 동부 지역에서 전개된 민주화 시위는 지난 20일 수도 트리폴리로 확산됐다. 카다피의 핵심 지지세력인 군 병력 중 일부가 시위대에 가세하면서 군부가 카다피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외신도 있다.

카다피의 차남인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38)가 일부 유화책을 내놓았지만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사태가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달으면서 카다피의 베네수엘라 도피설까지 나돌고 있다.


◆군부까지 돌아서나

AP통신은 현지 목격자들을 인용,"트리폴리에서는 하루종일 총성이 들렸다"고 보도했다. 또 일부 시위대가 트리폴리에 있는 알-자마히리야 TV와 알-샤뱌비아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해 한동안 방송이 중단됐으며 일부 정부 청사와 경찰서 등이 불탄 것으로 알려졌다.

CNN은 민주화 시위의 거점이던 벵가지는 사실상 시위대의 손에 넘어간 상태라고 전했다. 이날 시위 사망자 추모식을 진행하던 시위대는 폭탄을 실은 차량을 이용해 벵가지 시내에 있는 군 기지를 공격했다. "보안군이 시위대를 대상으로 집단학살을 자행했다"며 "벵가지 시내는 전쟁터와 다름없다"고 보도했다. 주요 외신들은 벵가지를 비롯한 동부 지역이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고 전했다. 미국 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HRW)는 이번 시위로 인한 사망자 수가 최소 233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군부의 동향도 심상찮다. 아랍 위성TV 알자지라는 벵가지에서 시위 진압에 나섰던 일부 군인들이 시위대에 가세,정부 보안군과 충돌했다고 보도했다.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해 왔던 카다피가 시위 진압에 말리 차드 등 인근 아프리카 국가의 용병을 투입한 것이 최대 실수"라고 지적했다.


◆카다피 베네수엘라 도피설 확산

리비아 정부는 서둘러 사태 수습에 나섰다. 카다피의 차남이자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돼 온 사이프 알 이슬람은 21일 리비아 국영TV에 출연해 반정부 시위를 중단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 개혁 추진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리비아는 (정권이 붕괴된) 튀니지나 이집트와는 다를 것"이라며 "무기를 들고 마지막 총알이 남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정권을 내놓을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일부 군사 기지와 무기가 시위대에 장악됐다"며 "시위가 계속될 경우 내전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비아 일부 부족과 정부 인사들은 잇달아 카다피에 반기를 들고 있다.

리비아 최대 부족 가운데 하나인 알 와팔라는 "카다피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다"며 "리비아를 떠나라"고 촉구했다. 동부 부족인 알 주와이야는 "정부가 폭력을 멈추지 않으면 24시간 내 서방 국가로의 원유 수출을 차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압델 에후니 아랍연맹 주재 리비아 대사와 무스타파 모하메드 아부드 알-젤레일 법무장관도 이날 “정부가 시위대 진압에 ‘과도한 무력’을 사용했다”며 항의의 표시로 사퇴의사를 표명했다고 현지 민간 신문인 쿠리나가 전했다.중국과 인도 주재 리비아 고위 외교관도 잇달아 사임 의사를 밝히는 등 외교관들의 정권 이탈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사태가 악화되면서 카다피 출국설이 확산되고 있다. 서 교수는 “평소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던 카다피가 공식석상에 나서지 않은 사실은 그가 이미 도피했을 수도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카다피 아들끼리 총격전을 벌였다는 ‘왕자의 난’ 설까지 돌며 리비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