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돈을 찾으면 우리도 손해지만 저축은행도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우리가 조금 참으면 괜찮다니까 다들 생각해 봅시다. "

22일 오전 10시30분께 경기 부천의 새누리저축은행 본점 2층 설명회장에는 30여명의 고객이 모여 있었다. 뒤편에 앉아 있던 희끗한 머리의 이모씨(76)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나도 이자를 받아 생활하는 입장이지만 넉 달 뒤 만기인데 지금 찾으면 120만원가량 손해를 본다"고 운을 뗐다. 그는 "어차피 5000만원까지 보호되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인출만 하지 않으면 저축은행도 살고 우리도 살고 그런다"며 예금 인출 자제를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이씨의 말에 "그 말씀이 맞아요"하고 호응이 일었다. "맞아,맞아"하는 작은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타이어 대리점을 하다 5년 전 은퇴했다는 장성곤 씨(71)는 "어제도 돈을 찾으러 왔다가 괜찮다고 해서 돌아갔는데 걱정돼 다시 와 봤다"며 "오늘 보니 정상 영업이 되는 것 같아 돈을 찾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차분해진 예금자들

부산 · 대전 등 6개 저축은행 영업정지 여파로 대량 예금 인출(뱅크런)이 일어날 가능성이 우려됐던 새누리저축은행은 22일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분위기였다.

옛 부실저축은행을 인수해 만든 새누리저축은행은 다른 은행과 달리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적용받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 17일 'BIS 비율 5% 미만 저축은행'으로 새누리 등을 거명하는 바람에 21일까지 인출자가 몰렸다. 18일에는 180억원가량,21일에는 200억원가량 예금 인출이 발생했다.

하지만 22일에는 예금 인출 고객이 전날의 8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오후 2시까지 400명가량이 번호표를 받아갔지만 절반가량은 그냥 돌아갔다. 이날 새누리저축은행 대주주인 한화그룹이 300억원 유상증자금을 납입해 자기자본비율이 2.7%에서 12.07%로 높아진 영향이 컸다. 이번 증자에는 한화건설 한화엘앤씨 한화호텔앤리조트 한화테크엠 등이 참여했다.

5000만원 이상 예금을 맡긴 고객 중에는 가족 이름으로 명의를 변경해 1인당 예금액을 5000만원 이하로 맞춰 놓고 돌아가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토마토 · 삼신 · 새누리 · 전주 등에 각각 돈을 맡겼는데 전주 쪽이 영업정지를 당해 불안해서 왔다"는 50대 여성은 "급전만 찾아놓으면 여기도 괜찮을 것 같긴 하다"고 했다.

김석견 새누리저축은행 상무는 "어제는 만기 예금을 재예치한 고객이 10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오늘은 오후 2시까지 83명이 24억원을 재예치했다"며 "상황이 진정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역 중소기업들은 '날벼락'

예금자들은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지만 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린 중소기업들은 애간장을 태워야 했다. 정부의 '자기자본비율 5% 미만 저축은행' 발표 탓에 저축은행들이 갑작스레 위협을 받았고,만기가 돌아온 기업들의 대출 연장이 어려워졌다.

새누리저축은행에서 운전자금(회사 운영자금)으로 30억원을 빌려쓴 자동차 부품업체 A사는 지난 주말 갑작스레 '만기 연장 불가' 통보를 받았다. 지난 18일이 만기였던 이 업체는 16일 "연장이 가능하다"는 언질을 받았지만,17일 정부 발표에서 이 은행이 거론되자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A사는 부랴부랴 보유 재고 등을 팔아 30억원을 마련,21일 대출을 상환했다. 부도는 막았지만 A사 관계자들에겐 악몽 같은 주말이었다.

태양광업체 B사도 마찬가지였다. 담보가 충분치 않아 기존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없던 이 업체는 한국전력에서 받을 돈을 근거로 새누리저축은행에서 30억원을 빌렸다. 새누리 측은 그러나 이 업체에 "만기 연장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통보했다. 다른 저축은행들도 대출을 회수하는 분위기여서 30억원을 갑자기 갚아야 한다면 이 회사는 그대로 도산할 수밖에 없다.

5억원 대출 만기가 24일 돌아오는 부천의 폐기물처리업체 C사도 상황은 비슷했다. C사 관계자는 "상황이 급속히 진정돼 은행에서 만기 연장을 해주기만 바라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새누리저축은행 여신담당자는 "우리에게도 우량 고객들인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상환 요구를 하게 돼 안타깝다"며 "300억원 유상증자 납입이 이뤄진 만큼 최대한 지역 기업들에 연쇄적인 자금 악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 보해 유상증자 추진

예금인출 사태에 시달린 저축은행들은 잇달아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300억원 유상증자를 받은 새누리뿐만 아니라 우리저축은행과 보해저축은행도 각각 대주주 유상증자 계획을 내놨다.

영업정지 명령을 받은 보해저축은행은 이달 말 150억원,내달 초 150억원을 증자하기로 했다. 또 보해양조 등 주주들로부터 740억원을 투자받아 1000억원의 유동성을 확보,조기 정상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우리저축은행도 대주주인 우신종합건설이 최대 200억원까지 유상증자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솔로몬 한국 현대스위스 등 대형 저축은행들도 유동성과 건전성 지표를 대폭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들 대형 저축은행은 금융당국과의 경영개선 이행 약정(MOU)에 따라 작년 말까지 100억~2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했다.

부천=이상은/안대규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