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자의 평균 수명이 3개월이었던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1년10개월을 버틴 후 살아 돌아왔던 이탈리아 화학자 겸 시인 · 소설가 프리모 레비(1919~1987 · 사진).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노마드북스 펴냄)은 오랜만에 만나보는 수작이다. 그가 생전에 펴낸 시집 《쉐마》와 《프레마의 선술집》을 시인 이산하 씨가 하나로 묶어 편역했다.

스물네 살 때부터 파시즘에 대항하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과 빨치산 활동에 참여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그는 수용소를 휘감던 검은 연기처럼,떨치기 힘든 공포와 절망 속에서 악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쉼없이 성찰한다. 지옥에서 돌아온 생존자가 기억을 더듬으며 읊조리는 사유의 결이 큰 공감을 불러온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하는 기차보다/ 더 슬픈 게 있을까?// (중략) 오랜 시간 고독하게 정해진 길만을 돌며/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믿는다면/ 그 인간 역시 슬픈 기차에 불과하리라.'('기차는 슬프다' 부분)

그의 시들은 의외로 담담하다. 야만적인 학살의 현장을 폭로하고 고발하려는 나치 증언문학과 달리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간명하다. 그래서 울림이 더 크다. 최고급 카펫 회사의 경영자인 알렉스 징크가 전후에 증인심문에 나섰다는 내용의 시를 보자.

'카페트 제조기술이 아주 좋은 모양이군./ 근데 그 훌륭한 솜씨는 어디에서 배웠소?/ 예? 그,그건…./ (중략)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머리카락으로… 카페트를 짜면서 배웠습니다. / 양모와 머리카락 중 어떤 게 더 품질이 좋던가?/ 아무래도… 머리카락이….'('증인심문' 부분)

'한 올의 머리카락이나 이름도 없이/ 무뇌아나 한겨울 개구리처럼 텅 빈 두 동공과/ 생리마저 얼어붙어버린 그런 여자들이 있다/ 생각해보라,이것이 과연 인간인지…./ 난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당신 스스로 깊이 깨닫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인간인가' 부분)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머리카락을,좁은 굴뚝의 연기로 사라진 후에는 나치에 전쟁 자금(금괴)용 금니를 제공하고 재로 변해선 비료로 쓰였던 인간의 비참함을 그는 차분하게 증언한다. 유태인 대학살의 총책임자로 전범재판에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답한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이제는 나치가 아니라 자신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하는 현대인에겐 '생각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 삶 자체가 죄'라고 말한다. 극한의 시기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단서를 찾으려 노력했던 그는 결국 68세에 투신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