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일.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취임한 지난달 3일부터 강원도 춘천 도민저축은행이 지난 22일 밤 문을 닫은 것을 마지막으로 8곳의 부실 저축은행을 정리하는 데 걸린 시일이다. 서울의 삼화저축은행을 시작으로 부산 대전 전주 목포 춘천 등을 아우르며 일사천리,속전속결로 해치웠다. 피해를 본 저축은행 예금자들이 "당분간 영업정지는 없다고 해놓고서 추가로 영업정지를 했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지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대책반장답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시나리오 갖고 있었나

전국 105개 저축은행은 저마다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거래하는 고객들도 대부분 서민들이다. 정치권과도 연결돼 있다.

금융당국이 저축은행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지난 2~3년간 근본 처방을 내놓지 못한 이유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당초엔 작년 상반기에 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지방선거가 있었고,결국 여당이 패배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보자는 쪽으로 방침이 정해졌다"고 말했다.

정부 내에선 큰 선거가 없는 올해를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적기로 봤다. '대책반장' 김석동이 부름을 받았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BH(청와대)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미리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머릿속엔 이미 '플랜'이 짜여져 있었다고 그를 아는 지인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친다.


◆속전속결 전법 선택

김 위원장은 '뚜껑'부터 찾았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상당수 저축은행들이 문을 닫게 되면 매각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시장의 불안심리를 잠재울 안전판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금융지주사가 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취임하자마자 금융지주사 회장들을 만나 저축은행 인수를 강력히 요청했다. 김 위원장은 "그분들이 오히려 시간이 없다며 구조조정의 시급성을 강조했다"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제2금융권에서도 (저축은행을) 인수하겠다는 요청이 들어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응은 바로 나왔다.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지난달 5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제신문 주최 다산금융인상 시상식이 끝난 뒤 저축은행 인수 의사를 밝혔다. 다른 금융지주사 회장들도 잇달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그로부터 열흘이 못돼 금융위는 서울의 삼화저축은행 영업정지 결정을 내렸다. 김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갖지 않았다. 이후 현안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금융위 간부 대상 강연과 출입기자단 신년회가 열린 지난달 21일에도 개인적인 관심사인 '고대사' 이야기만 했다. 잇따른 질문에도 저축은행 문제에는 입을 닫았다. 다만 사석에서는 "(구제역에 비유하자면) 삼화의 살처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알아서 와 나자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미리 세워둔 조치가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10곳 명단 공개'초강수'

그가 취임한 뒤 기자실에서 직접 브리핑을 한 것은 지난 17일이 처음이었다. 눈은 충혈됐고,평소와 달리 얼굴엔 미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새벽 1시30분에 퇴근해 잠도 자지 않고 3시30분에 나와 직접 발표문을 가다듬은 뒤였다고 한다.

이어 예상치 못한 명단이 발표됐다. 김 위원장은 이날 영업정지된 부산저축은행과 대전저축은행뿐만 아니라 부산저축은행의 나머지 계열사(부산2 · 중앙부산 · 전주)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5% 미만인 5개사(보해 · 도민 · 새누리 · 우리 · 예쓰) 등 10곳의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적시한 발표문을 읽었다.

그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정부가 구조조정하면서 명단을 발표한 건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과 일반의 판단에 맡겼다고 보면 된다"는 해석까지 곁들였다. 부산 계열사 3곳과 자기자본비율 5% 미만인 곳에서 예금인출사태(뱅크런)가 충분히 예견됐고,"그럴 수 있다"는 얘기까지 했다.

이날부터 뱅크런이 전국에서 나타났다. 전체 저축은행의 예금인출액은 17일 3022억원에서 18일엔 4822억원으로 불어났다. 부산지역 저축은행들의 상황은 심각했다. 불과 이틀 만인 19일(토요일) 부산2 · 중앙부산 · 전주저축은행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영업정지를 신청했고,목포의 보해도 유동성 소진으로 영업을 정지당했다.

◆공동계정…또 다른 도전

4곳의 저축은행 영업정지가 발표된 직후인 지난 21일 월요일이 고비였다. 급거 부산을 찾은 김 위원장은 직접 우리저축은행을 찾아 마이크를 잡고 "돈을 빼가면 영업이 정지된다"며 자제를 호소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전날보다 많은 4951억원이 빠져나갔다.

김 위원장은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목포로 날아갔다. "예금인출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는 오전 상황을 보고받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날 춘천의 도민저축은행이 스스로 휴업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밤 금융위를 소집해 영업정지라는 '철퇴'를 내렸다.

'김 위원장의 51일'은 마치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착착 진행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달 삼화저축은행 영업정지 이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이 심각한 부산저축은행에선 예금인출이 진정되지 않았고,이후 영업정지가 영업정지를 부르는 상황으로 전개됐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 드는 근거다.

김 위원장은 저축은행 대주주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도 전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대주주들도 크게 각성하고 당국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됐을 것"이라며 "저축은행 대주주들이 잇달아 자본을 확충하고 있는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

'부실 저축은행을 영업정지'시킨 1단계 조치를 끝낸 김 위원장의 다음 과제는 예금보험공사 내 공동계정 설치를 위한 정치권 설득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향후 인수 · 합병(M&A)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의 저축은행 구조조정 '플랜'도 상당한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