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감방에서 두 남자 죄수가 대화를 나눈다. 한 명은 게릴라 활동을 하다 검거된 정치범 발렌틴,또 한 명은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진 죄로 수감된 동성연애자 몰리나다.

몰리나는 수감 생활의 따분함을 잊기 위해 발렌틴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투사 발렌틴은 낭만주의에 빠진 몰리나를 경멸한다. 몰리나도 차갑기만 한 발렌틴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발렌틴은 몰리나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발렌틴은 여주인공 마르타와 검은 표범이 등장하는 영화 속 주인공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다. 몰리나가 실감나게 읽어주는 비극적 이야기는 극중 극 형태로 이들의 관계를 암시한다.

발렌틴이 음식을 먹고 심한 복통을 겪자 몰리나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극이 중반으로 흐르면 관객들은 몰리나가 감옥 소장으로부터 발렌틴이 속한 반정부조직에 관한 정보를 캐내라는 압박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몰리나의 가석방이 미끼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발렌틴이 몰리나를 서서히 받아들이면서 극의 긴장이 고조된다.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가 절정에 이를 때 둘은 육체적 사랑을 하게 된다. 발렌틴은 몰리나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죽는 게 끔찍하게 두려워.여기서 죽어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인생의 무게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

발렌틴이 자신의 동료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몰리나는 제지한다. 그의 이야기를 감옥 소장에게 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다.

등장 인물의 섬세한 심리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동성애가 주제는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몰리나를 무시하고 경멸했다가 정반대로 바뀌어가는 발렌틴의 모습은 성과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는 게릴라의 사상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연출가 이지나 씨는 이 작품을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간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사랑으로 펼쳐놓는 데 성공했다. 원통의 구조물을 겹겹이 쌓아올린 무대는 빠져나갈 곳 없는 감옥을 거미줄로 형상화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몰리나 역을 번갈아 연기하는 정성화와 박은태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성화는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노련한 위트로 몰리나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박은태의 몰리나는 절실함이 더 묻어난다. 그러나 몰리나가 부르는 '볼레로'(쿠바의 트로트 음악에서 유래한 음악)는 쿠바의 느낌을 온전히 살리지 못했다. 반도레온이나 기타 소리가 곁들여졌더라면 나았을 것이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1992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1993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그해 토니상에서 남우주연상 등 7개 부문을 휩쓸었다. 내달 24일까지 대학로 아트원 시어터 1관.3만~5만원.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