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수수료는 제조업체로 치면 원가와 같은 것인데,이런 핵심적인 영업기밀을 공개하라는 게 말이 됩니까. "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대형 유통업체 최고경영자들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일장 훈시'를 했던 날,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한 백화점 대표는 볼멘소리를 했다.

정치권과 정부의 규제 칼날이 유통업계에 집중되면서 유통 대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 출점에 제동을 건 유통 관련법이 지난 연말 국회를 통과한 데 이어,공정위는 최근 2분기 안에 유통업체들의 판매수수료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대기업의 이익 중 일정 비율을 협력업체에 지원토록 하는 '협력사 이익공유제'까지 들고 나왔다. 동반성장지수 평가대상 56개 기업 리스트에는 유통업계 선두권 기업인 롯데쇼핑,신세계,삼성테스코가 올라 있다.

당장 판매수수료 공개가 '발등의 불'이다. 공정위는 유통회사와 입점업체 간 개별 협상의 산물인 판매수수료를 공개해 수수료 수준이 낮아지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과연 그렇게 될까. 백화점에 논의를 한정시키면 판매수수료를 밝힌다고 해서 수수료 수준이 낮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경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 백화점업계는 전형적인 독과점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롯데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문에 롯데의 기준은 국내 백화점 전체의 기준이 된다. 수수료 수준은 물론이고 세일행사 날짜까지 롯데는 다른 백화점들의 모델이다. 이런 현실을 모르고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판매수수료가 백화점과 협력업체 간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는 근본 원인은 우리나라 백화점 특유의 '특정매입 거래'에 있다. 현행 고시에 따르면 특정매입이란 '소매업자가 납품업자로부터 상품을 외상으로 사고,팔고 남은 재고는 반품할 수 있는 위 · 수탁거래'라고 규정하고 있다. 규정대로 하면 판매책임은 백화점이 져야 하지만,실제 관행은 그렇지 않다. 납품업자가 자기 비용으로 매장을 꾸미고 자사 직원을 파견해 상품을 판다. 판매책임이 납품(입점)업체에 있으므로 백화점은 재고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한다는 혹평을 듣는 이유다.

특정매입 방식은 일본에서 따왔다. 이 방식에 안주해온 일본 백화점업계는 2000년대 들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매출이 급감하는 바람에 최대 백화점이었던 소고는 2000년 도산했다. 생존을 위한 백화점 간 통합도 줄을 잇고 있다. 최상철 일본유통과학대 교수는 일본 백화점 몰락의 원인을 "편한 장사에 익숙해져 혁신을 외면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결국 판매수수료는 후진적인 유통구조의 산물이며,그 혜택을 백화점 업계가 만끽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대형 백화점들의 두 자릿수 성장이 자체 경쟁력에 따른 것인지,혁신업태 출현을 가로막는 국내 유통환경 덕분인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일본처럼 전국으로 확산된 쇼핑센터(복합쇼핑몰)가 전문점들을 자유롭게 수용하는 시점에서도 한국 백화점들이 고성장을 누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유통시장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한다면 정부는 유통 대기업들을 윽박질러 '반짝효과'를 거두는 것보다 유통 혁신업태 출현을 방해하는 '전봇대'들을 치워주는 데 한층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경제학 박사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