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리비아 쇼크'로 배럴당 120달러 턱밑까지 치솟으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유럽중앙은행(ECB) 등 주요국 중앙은행에도 비상이 걸렸다. 원유발(發) 도미노 인플레이션이 힘겹게 살려온 경기 회복을 억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책을 짜내야 하지만 쉽고 확실한 카드는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야 하나. 28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벤 버냉키 미국 FRB 의장은 1일부터 이틀간 의회 청문회에 참석,인플레이션 관련 경제정책 방향을 증언할 예정이다. 3일에는 ECB가 유가 폭등 관련 인플레이션 대책회의를 연다. 관심사는 두 곳 중앙은행이 국제 유가를 긴박한 금리 인상 요인으로 판단하느냐 여부다.

유럽 전문가들은 그동안 ECB가 금리를 조기에 인상할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봤다. 지난 1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의 소비자물자지수(CPI)가 전년 동기 대비 2.4% 상승하며 ECB의 목표치를 넘어서긴 했지만 변동성이 심한 에너지 · 식품 등을 뺀 핵심 인플레이션 지수는 아직 1%대로 '완만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경제전문가들이 그럼에도 '금리 인상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의 최근 발언 때문이다. 그는 1월에 "핵심 인플레이션이 반드시 미래의 기초 인플레이션을 예견하는 좋은 지표는 아니다"고 말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이번만큼은 다른 판단,다른 결정이 내려질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 때문에 트리셰의 일거수일투족에 유럽 금융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나이젤 굴트 IHS글로벌인사이트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은 '인플레이션 공포증'이라 할 만큼 물가 상승 요인에 민감하게 대응해왔다"며 "최근 유로화가 오르는 것을 볼 때 금리 인상 쪽으로 갈 공산이 크다"고 진단했다.

반면 미국은 유가 상승이 지속된다 해도 아직까지는 금리 인상 가능성이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고유가가 소비를 위축시키고,결국 핵심 정책 타깃인 실업률마저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유럽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얘기다. 실제 원유 가격이 배럴당 147달러를 돌파했던 2008년에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ECB는 당시 금리를 인상했지만,FRB는 인상을 자제했다.

버냉키 의장은 3월 의회 증언에서 "경기 회복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노동시장은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기존 발언과 맥락을 같이하는 경기동향 분석 결과를 내놓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부의 과도한 지출 삭감이 경기 회복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경고도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제로금리 유지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냉키 의장은 의회로부터 "물가관리에 집중하라"는 압력도 받게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인 만큼 금리 인상 카드를 미룰 수만도 없다.

한편 지난주 폭등세를 보였던 국제 유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증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번 주 들어 소폭 하락하는 등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 원유(WTI) 가격은 0.82% 하락한 배럴당 97.08달러(한국시간 28일 밤 12시)를 나타냈다. 북해산 브렌트유 4월 인도분 선물 가격도 0.29% 내린 배럴당 111.81달러에 거래됐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