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24일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관련 담화에서 북한에 대해 책임자 처벌과 함께 사과를 요구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북한의 사과 없이는 대화도 없다"고 못 박았다. 북한이 연평도 포격 도발을 일으키자 지난해 11월29일 역시 담화문을 내고 "북한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며 햇볕정책의 실패를 공식화했다. 이후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여러차례 밝혔다. 이날 담화를 내놓기 하루 전 만난 다이빙궈 중국 국무위원이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을 타진한 데 대해 "6자회담을 논할 때가 아니다"고 잘라말하기도 했다.

그런 강경기조는 불과 한 달 뒤부터 변화 조짐을 보였다. 이 대통령은 12월29일 외교통상부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6자회담 국가들의 합의를 통해 내년에는 큰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올해 들어 대화 의지는 더 강해졌다. 1월14일 서울을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에게 "금년이 남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1일 신년 좌담회에선 "북한이 변화할 좋은 시기다. 기대를 잔뜩하고 있다"고 했다. 20일 기자간담회 때도 "금년에 대화를 통해 북한이 변화를 하고…"라며 기대감을 보였다.

3 · 1절 기념사에선 한발 더 나아갔다. '천안함''연평도''사과' 등 세 단어가 아예 사라졌다. "언제든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대화를 위한 전제를 포기한 건 아니지만,전향적 대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과'라는 전제보다 '대화'에 방점을 뒀다는 얘기다. 지난해 보였던 강한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입장 선회는 올해 중 남북관계 진전을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한 것 같다. 내년엔 임기 마지막 해인 데다 총선과 대선이 있어 획기적 남북관계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청와대 안팎에선 '4월 모멘텀'설까지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북한은 우리 정부의 기대와 달리 연일 '핵 참화'를 운운하며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있다. 과거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우리만 유화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마냥 '강 대 강'으로 '한반도 리스크'를 높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집권 4년차 성과주의에 급급한 나머지 대북 기본 원칙까지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홍영식 정치부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