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국가 밖의 국가' 기업이 조약 체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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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도회사의 영토확장
군사력 갖추고 전쟁 선포하기도…비즈니스하면서 식민사업 동시에
군사력 갖추고 전쟁 선포하기도…비즈니스하면서 식민사업 동시에
아시아와 유럽이 경제적으로 조우하는 가장 큰 창구는 동인도회사였다. 17세기부터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등 여러 국가가 주식회사를 만들어 아시아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는 언뜻 이상해 보이는 일이다. 근대 초에 유럽이 해외 팽창을 시도할 때 정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정복과 식민지배를 시도할 것 같은데,왜 주식회사를 만들어 해외로 내보냈을까.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2년 늦은 1602년에 건립돼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는 빼앗겼지만 한 세기 이상 세계 최대 규모의 회사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사례를 통해 그 사정을 알아보도록 하자.
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유럽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인구 100만명의 소국인 포르투갈이 100년 이상 유럽과 아시아 간 무역을 독점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광대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6세기 내내 유럽의 여타 국가들은 포르투갈의 제지를 뚫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자국 선박을 보내 독자적인 교역 네트워크를 건설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직도 왕복 1~2년이 걸리는 인도 항로는 너무나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각국 대상인들은 리스본이나 앤트워프에서 포르투갈 왕실이 처분하는 아시아 상품들을 구매해 유럽 각지에 판매하는 것만으로 큰 수익을 얻었으므로 굳이 원거리 항해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정치적 격변의 결과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당하고(1580~1640년) 무역 정책도 바뀌어 기존 아시아 상품 '도매업'에 참여했던 대상인들 중 다수가 배제됐다. 1590년대부터 네덜란드 상인들은 모험회사들을 결성해 직접 선박을 아시아로 보내기 시작했다. 10여개 회사가 난립해 그중 일부 회사의 배들이 아시아 각지를 항해하며 거래처를 여는 데 성공했다. 아시아 교역의 수익성도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이 회사들 간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이대로 가면 공멸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암스테르담 회사는 라이벌인 젤란드 회사의 배가 접근하면 현지 상품을 선적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방해하고 최악의 경우 직접 공격하도록 사주할 정도였다.
드디어 중앙정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시도했다. 그동안 각자 활동하던 소규모 회사들을 모아 하나로 합친(Vereenigde) 동인도(Oostindische) 회사(Compagnie),곧 '통합 동인도회사(VOC)'를 만들었다. 네덜란드 각 지역 간 투자 지분 비율,이사진 배분,회사 본부 소재지 등 갈등의 요소들은 정부가 강제로 조정했다.
이런 정책을 편 데는 경제적 이유와 함께 강력한 회사가 활동함으로써 적국인 스페인 · 포르투갈에 타격을 주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탄생부터 정치와 경제가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이와 같은 특이한 성격은 회사 설립시 정부로부터 받은 특허장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우선 동인도회사는 희망봉 동쪽과 마젤란해협(남아메리카 최남단) 서쪽 사이 지역에 대한 항해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그와 동시에 이 회사는 의회를 대신해 조약 체결,전쟁 선포,요새 건설,징병 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전쟁과 외교 권한을 일개 주식회사가 행사한다는 것은 정말로 특이한 사항이다. 말하자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국가 기능의 일부를 위임받은 '국가 밖의 국가'가 됐다. 한편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하면서 다른 한편 식민지 사업과 외교 등의 일을 동시에 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회사는 17세기 초 3000명의 군인을 충원했고,그 수가 점차 불어나 1750년 즈음에는 1만7000명에 달했다.
이처럼 자본과 국가가 결합된 방식이 당시 사정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해외 팽창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이 회사의 아시아 교역 실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컨대 인도 직물을 사 가지고 인도네시아에 가서 판매한 다음,이곳의 후추를 사서 중국으로 간다고 하자.이런 거래의 연쇄가 매끄럽게 잘 이뤄져야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인도네시아 시장에 이미 직물이 포화 상태라 현지 상인들이 동인도회사 상인들이 가지고 온 직물을 사지 않으려 한다든가,이곳에서 반드시 후추를 구매해야 다음 거래가 이뤄지는데 후추를 안 팔든가 혹은 값을 과도하게 올려 받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럴 때 유럽 상인들은 가차없이 총칼을 휘둘렀다. 자신들의 거래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동인도회사의 태도였다. '한 손에 주판,다른 한 손에 칼'이라고 표현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공정하게 이야기하면 유럽 상인만 이런 것이 아니라 아시아 상인 혹은 세계 대부분의 상인들이 이런 태도를 보였다.
오늘날의 비즈니스 환경을 염두에 두고 수백 년 전 상업세계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때는 아직 해양법,보험,경찰 같은 것이 없던 때다. 수만리 떨어진 낯선 지역에 뚫고 들어가 이방인들과 거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변,배와 상품의 안전을 스스로 확보해야 했다. 더 나아가 무력을 행사해 거래를 유리하게 만들고,심지어 무장이 불충분한 배를 만나면 아시아 배든 유럽 배든 거침없이 해적질도 했다. 무력행사와 비즈니스가 결합돼 있는 이 상황을 고려하면 주식회사인 동시에 국가 권력을 위임받은 동인도회사가 왜 효율적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상업 세계에 동인도회사가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유럽인들은 시장경제를 확대해 나가면서 그 안에서 수익을 취했지만,그들의 시장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또 그것을 유리하게 운영하기 위해 거침없이 무력을 행사했다. 무력이 뒷받침된 시장경제,이것이 유럽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