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면, "정치는 정파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정치인은 정당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데,그 정당이란 정파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당을 의미하는 용어가 영어로 'party'인데,그 어원을 보면 '부분'을 뜻하는 라틴어의 'pars'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를 이처럼 파당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다원주의 사회의 특징은 잘 드러난다. '절대적인 선'이 군림하기보다는 다양한 선들끼리,심지어 다양한 악들끼리 경합하는 사회가 다원주의 사회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문제가 있다. "정치는 정파적인 것"이라고 할 때,공동선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게 된다는 점이다. 어떤 정권이건 출범하면서 자기 사람만을 쓰지,남의 사람을 쓰는 경우는 없다. 진보정권 때나 보수정권 때나 같은 성향의 인사만 기용하니까,'코드인사'니 '회전문 인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정치인들도 여야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자신과 자신의 패거리,혹은 자신의 지역만 생각한다. 물론 많은 정치인들이 '정파적 선'만 추구한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을는지 모른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라는 것이 있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 신비한 힘에 의해 공공의 이익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빵집 주인이 돈을 벌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면 그 시간까지 밥을 먹지 못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파적 이익만 추구하다보면,저절로 '공동선'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여당은 밀어붙이고 야당은 반대만 하고,공항을 유치하겠다고 지역끼리 격렬하게 싸우는 등,흙탕물 싸움을 하면 어느덧 국리민복과 같은 공공의 이익이 '하늘에서 동아줄 내려오듯' 저절로 나올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이기심이 모여 저질스러운 상황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게을러 자기 집 주변을 불결하게 만들면 청소를 잘해놓은 근처의 다른 모든 집들도 지저분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케인스는 '구성의 오류'라고 했다. 실제로 정치인 각자가 서로 간에 "내 이익을 챙기겠다"고 행동할 때 '공동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악'이 될 수 있음을 우리 주변에서 익히 보아왔다.

최근에는 국회의원,시도지사,지방의원들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와 동남권신공항을 자기들 지역으로 유치하겠다고 끼리끼리 뭉치고 뒤엉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이들이 자기 지역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 자체를 가지고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나라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가" 고민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유감이다.

"내 입장에서,내 지역의 입장에서,내 이념적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질문만 하는 정치인이라면 '정파적 정치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정치인이야말로 '진정한 정치가'가 아닐까.

또 지역,보수와 혁신,세대 간 다툼의 소지가 있는 중대 쟁점들이 발생할 때마다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든지 "쥐를 잡기 위해 독을 깰 수 없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배짱 있는 정치가'가 몇 사람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운동경기처럼 상대방과 더불어 격렬하게 다투고 싸우는 데서 '정치의 묘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술사가 소매에서 갑자기 새를 끄집어내 청중들을 열광시키듯, 우리 정치인들도 다툼과 대립으로 얼룩진 사안에서 화합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정치에 대한 묘기'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