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휩쓸고 있는 '재스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마침내 리비아산 원유 공급에 차질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국제 원유가격은 배럴당 120달러 선을 위협하며 폭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정부는 2008년에 마련한 유가비상대책 시나리오를 다시 꺼내 에너지 경보단계를 '주의'로 격상하고 제1단계 원유수입 관세인하 조치 발동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국내 분위기는 유가가 현재 2008년 최고치인 147달러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라며 애써 낙관하려는 듯하다. 아마도 시민혁명을 반기는 인도주의적 관심과 혼란이 지나고 나면 다시 정상화되리라는 희망에서 나오는 기대일 것이다. 그러나 원유의 수요와 공급,석유수출국기구(OPEC) · 신흥경제국 간의 역학관계를 살펴본다면 좀더 길게 보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유가가 제자리로 쉽게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지 말자.수요 측면에서 볼 때 2008년 7월까지 유가가 치솟은 원인은 2005년 이후 세계 원유소비량 증가율이 생산량 증가율을 상회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가 상승을 견인한 신흥경제국의 에너지 수요는 지금도 건재하다. 2008년 후반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 불황으로 잠시 배럴당 36달러 수준까지 에너지 수요가 밀렸을 뿐이다. 최근 선진권의 경기회복과 함께 이들을 시장으로 삼고 있는 중국 인도 중남미 등 신흥경제국의 에너지 수요가 다시 늘어 지난해 세계 순수요 증가는 하루 270만배럴에 달했다. 재스민 혁명 이전에도 유가는 상승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수요는 올해 150만배럴 더 늘어날 전망이다.

둘째,사우디아라비아의 추가 증산 능력에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공급 측면에서 볼 때 최근 리비아의 생산 차질을 사우디가 증산으로 메워 폭등했던 유가가 일시 조정된 것처럼,그간 500만배럴에 달하는 OPEC 회원국의 잉여생산능력은 비상밸브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신흥경제권의 순수요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리비아 외에 가령 알제리의 원유생산이 중단되는 사태만 발생해도 잉여능력은 즉각 소진된다. 노무라증권이 예측한 220달러 시나리오는 이런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더욱이 사우디가 아니더라도 어느 걸프만 국가로든 혁명이 확산될 경우 원유 공급 및 수송 비상사태는 불보듯 뻔한 일이다.

셋째,OPEC의 자율적인 가격 및 생산조정에 기대하지 말자.OPEC은 과거 오일쇼크가 세계경제 불황을 야기해 궁극적으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고 스스로 가격 및 생산량을 조정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다르다. 오일쇼크를 치렀던 선진국들은 비OPEC 국가들로 수입처를 다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대체에너지 개발과 소비효율화를 통해 석유소비량을 대폭 줄여왔다. 대신 신흥경제권이 이들의 강력한 고객으로 등장해 화석연료 집약적인 산업구조로 고성장을 구가하며 원유 확보에 혈안이 돼있는 마당이라 OPEC으로서는 원유 고가판매를 마다할 필요를 못느끼는 상황이다.

결국 몇년 전 왔을 최악의 유가사태가 세계금융위기로 미뤄졌다면,오늘의 재스민 혁명은 다시 살아난 고유가 행진의 먹구름을 잠시 가리고 있는 셈이다. 그간 우리는 에너지 확보 자급률 제고,에너지 공급선 다변화 등 수많은 대책을 세워왔다. 또 진정한 해결책이 유럽국가들과 일본이 추구한 혁신적 에너지사용 효율화 및 대체에너지 개발임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가가 다시 떨어지면 많은 과제들을 연기하곤 했다. 정부의 대책이 유류세 인하나 환급과 같은 소비자 부담경감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면 고유가 불감증만 키울 뿐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현 위기를 에너지 소비구조와 패러다임 전환의 실천적 기회로 삼는 결단과 리더십이 절실하다.

김원호 <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