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일본경제 리포트] (上) 日 총리 20년 새 15명…포퓰리즘에 복지 커녕 민생조차 못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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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 경제 발목 잡는 정치
정쟁에 '잃어버린 20년'…장기 정책 수립 엄두 못내
불안한 기업, 투자 꺼려…이익 나면 해외로 눈 돌려
정쟁에 '잃어버린 20년'…장기 정책 수립 엄두 못내
불안한 기업, 투자 꺼려…이익 나면 해외로 눈 돌려
"거의 매년 총리가 바뀌고 평균 2년에 한 번꼴로 선거를 치르는데,이런 나라에서 제대로 된 정치가 가능하겠습니까. " 곤도 요스케(近藤洋介) 중의원 의원(민주당)은 또 다시 총리 퇴진 위기를 맞은 일본의 정치 현실에 대한 한탄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를 만난 3월 초순의 일본 정가에는 아직 삭풍과 비바람이 몰아치는 도쿄의 날씨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각책임제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정치불안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지만,일본처럼 자주 선거를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 그는 일본 경제를 일컬어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하지만,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일본 정치의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말했다. 지난 20년간 일본의 총리는 무려 15명이 바뀌었다. 이 중 5년간 재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를 제외하면 평균 1년에 한 번씩 총리가 바뀐 셈이다. 이런 상황은 53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룩한 2009년 민주당 집권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임 총리가 10개월을 못 채운 채 물러났고,지난해 6월 총리에 오른 간 나오토(菅直人) 현 총리 역시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조차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정치가 이렇게 혼란을 거듭하다보니 일관성 있고 장기적인 국가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언론인들의 모임인 프레스센터는 매년 초 그해 연말의 정치상황,주가,환율,스포츠 등에 대해 예측을 하는데 올해 12월 일본의 총리 자리에 누가 앉아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안한 정치는 곧바로 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기업들은 보수적인 경영전략을 펼 수밖에 없다. 일본 기업들이 이익이 생겨도 새로운 투자를 꺼리고,투자를 하더라도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라는 지적이다. 일본 산업자동화기기 업체인 오므론의 대표이사 회장을 지낸 원로 기업인 다테이시 노부오(立石信雄) 씨는 "일본의 장기 경기침체 배후에는 정치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 20년간 중국의 국내총생산이 3배로 늘어나며 일본을 따라잡는 동안 일본은 정치에 발목을 잡혀 왔다는 것이다.
일본 전문가들은 "현 상태에서 총리가 바뀌거나 총선을 통해 집권당이 교체된다고 해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기시이 시게타다(岸井成格) 마이니치신문 주필은 "다른 당이 집권해도 지금보다 좋아질 것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정치권에서 총선 요구가 거세지고 간 총리의 지지도는 20%대로 떨어졌지만,일본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총리 퇴진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대안부재 때문"이라고 했다.
간 총리와 민주당이 코너에 몰린 주된 이유는 표를 의식해 과도한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비롯 각종 공약을 내세웠지만 집권 후 "현실적이지 않다"며 뒤늦게 수정하는 등 허둥대는 모습을 보인 탓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포퓰리즘 정치는 자민당 집권시절에도 계파 간 경쟁과정에서 고질적으로 난무해 왔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러다보니 정치권에서는 총리 지지도가 조금만 낮아지면 총리 퇴진과 총선에 대한 요구가 쏟아지고,국민들 역시 인기투표식의 선거에 익숙해져 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정치인도 책임있는 장기적인 국가 비전보다는 "일단 선거에서 뽑히고 보자"는 식의'공약(空約)'을 남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일본의 정치현실이라는 것이다.
일본 중의원은 지난달 28일 저녁,3월부터 시작하는 2011 회계연도 예산안을 처리했다. 하지만 일본의 새해 예산은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고 있다. 92조엔에 달하는 예산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44조엔은 적자국채 발행을 통해 충당해야 하는데 이의 근거법인 '공채특례법'을 비롯 각종 예산 부수법안들이 야당은 물론 여당 내 일부 그룹의 반대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탓이다.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고도 부수 법안으로 인해 발이 묶인 것은 초유의 일이다. 이에 따라 각종 민생 예산도 제대로 집행될지 극히 불투명하다. '복지 향상'을 기치로 내걸고 집권한 민주당이 결과적으로 기초적인 민생마저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복지 교육 등을 놓고 각종 포퓰리즘성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한국의 정치권에 일본은 더없는 반면교사다.
도쿄=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