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은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 씨(44 · 사진)가 자전적 희곡을 들고 한국 관객을 찾아왔다. 유씨는 9~1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 혼란을 그린 연극 '해바라기의 관'을 선보인다. 재일교포 연출가 김수진 씨가 이끄는 극단 신주쿠양산박이 제작을 맡았다.

유씨의 작품이 국내 무대에 오르는 것은 2005년 '그린벤치',2007년 '물고기의 축제'에 이어 세 번째다. 공연을 하루 앞둔 그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아직도 땅이 아니라 다리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에요. 일본에서 재일교포 문학은 아직도 다른 문화일 뿐이죠.한국과 일본을 연결한다지만 혹 바람이라도 불면 온몸으로 먼저 맞아야 하니까요. "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트위터 화면을 보여줬다. 누군가가 그의 열한살 난 아들을 '조선인이니까 없애야 된다'며 비난하는 글을 올린 것.그는 "한류 붐에도 재일교포들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처럼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끔찍한 원망이 교차된다. 부드럽고 애교스러운,하지만 피를 토하듯 절절한 그 세계를 긴 호흡으로 다듬은 작품이다.

그가 21세 때 쓴 소설 《해바라기의 관》은 일본 요코하마를 배경으로 일본인 샐러리맨과 재혼한 어머니가 떠난 뒤 남은 가족의 슬픈 자화상을 그린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몰라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오누이와 한국인 여자 유학생,일본인 청년과의 어긋난 사랑과 파멸 등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이니치'(재일 한국인)의 씁쓸한 현실을 담는다.

"주인공을 통해 무엇인가 가로막힌 벽을 넘으려고 하지만 끝내 이룰 수 없는 가족의 붕괴를 그린 것이죠.연출을 맡은 김수진 씨가 해바라기 밭 장면 등 아름답고 동화 같은 모습을 만들어줘 시각적인 감동까지 제공할 거예요. "

그의 작품은 대부분 자전적인 요소를 짙게 깔고 있다. 그는 대중 앞에 자신의 상처를 꺼내놓는 데에도 거침이 없다. 몇년 전 혼외 임신 사실도 일본의 한 주간지를 통해 공개했으며 미혼모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그 과정을 기록한 자서전 《생명》도 펴냈다.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와 폭력,친구들의 집단 따돌림,일본 극우단체의 테러위협 등을 담은 《유미리의 모든 불행 기록》 표지에 자신의 누드를 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자신의 상처를 세상에 드러내면서 더 상처받을 때도 많을 법하지만 그는 글 쓰는 것이 치유의 과정이라고 믿는다. "저는 아직도 절박해요. 음식을 먹고 체했을 때 바늘로 손을 따는 듯한 기분으로 글을 써요. 그 절박함이 사라지면 비극적인 작품을 쓰지 않을 거예요. "

자신을 '비극 작가'라고 하지만 그의 표정은 아이처럼 해맑다. 요즘엔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그는 이번 작품을 끝낸 뒤 서울로 이사할지 결정할 계획이다. 공연 개막을 앞두고 긴장감도 감추지 않았다. "20대부터 한국 독자들을 책으로 만났지만 공연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 떨려요. 《해바라기의 관》을 쓸 무렵인 20년 전의 나를 다시 만날 거라는 생각에 기대도 되고요. "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