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동물의 세계에선 큰 놈이 작은 놈을 잡아먹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빠른 놈이 느린 놈을 잡아먹는다. 이 같은 초원의 법칙이 정보화 시대를 맞아 치열한 무한경쟁을 하는 국가와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옛 소련이 몰락하고 동구권이 철의 장막을 걷어 올릴 때 너무 주판을 튕기며 머뭇거리던 일본 기업보다 먼저 우리 기업이 체코 폴란드 등을 치고 들어갔다. 요즈음 이들 국가에 가보면 우리 기업들이 선발자(first-mover)로서의 이익을 누리고 있다.

다시 우리나라가 미국에 이어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국회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일본 중국 등 주위 국가들은 발 빠른 한국의 FTA 행보를 '질시 반,우려 반'으로 쳐다본다. 중화대국을 꿈꾸는 중국은 겨우 ASEAN 파키스탄 칠레와,일본은 칠레 싱가포르 베트남 같은 나라들과 FTA를 맺고 있다. 말하자면 중국과 일본의 주요 교역파트너는 모두 빠진 국가들과 체면치레 비슷한 FTA 간판만을 내건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겁(?)도 없이 세계 최강의 미국과 손을 잡더니 이제 다시 EU와 FTA를 성사시켰다. 지난달 17일 유럽의회가 한 · EU FTA 비준안을 통과시켰다니 우리 국회만 빨리 움직여 준다면,한국은 일본 중국은 물론 미국 등 쟁쟁한 경쟁국을 제치고 거대한 EU시장을 선점할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EU는 27개국 시장을 총괄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경제권으로 우리에게는 중국 다음으로 중요한 교역 상대다. 지난해 10월 국회에 제출된 한 · EU FTA 비준동의안이 진통 끝에 지난주 국회 외교통상통일 위원회에 상정됐다. 정부는 예정된 7월 발효를 위해서는 10여개 이상의 후속 법안이 마련돼야 하므로 국회에서 비준안을 조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구제역으로 혼란스런 상황에서 EU와의 FTA가 비준되면 돼지 등 국내 축산농가에 큰 부담이 된다며 '선대책 · 후처리 원칙'을 주장해 왔다. 다행히 최근 여야가 4월 임시국회에서 비준안 처리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처리'와 '심의'를 놓고 여전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나름대로의 고유한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는 여당과 야당은 당연히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때론 국익을 위해서라면 정치적 아집을 과감히 내던지고 신속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한 · EU FTA는 한 · 미 FTA와 분리해 가능한 한 빨리 국회에서 비준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이번 여름부터 발효돼 유럽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선발자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워싱턴을 자극해 한 · 미 FTA 비준까지 앞당기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북한의 연평도 도발이 있은 후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영국의 캐머런 총리가 우리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며 대책을 협의했다. 전례를 찾기 힘든 드문 일이다. EU와 FTA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효과뿐만 아니라 27개 회원국과 정치적 유대관계까지도 강화한다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이는 당연히 북핵,한반도 통일 등에 있어 EU 국가들의 지지로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보다 단단한 입지를 굳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품질의 포도주라도 칠레산보다 프랑스산이 약 20% 정도 높은 가격을 받는다. 국가 브랜드의 차이 때문이다. 한 · EU FTA는 대한민국의 국가 브랜드를 격상시켜 현지에서 우리 수출 제품이 제 값을 받게 할 뿐만 아니라,유럽 기업의 한국에 대한 투자도 촉진할 것이다.

이왕에 우리 정부가 경쟁국보다 빨리 움직여 유럽시장의 문턱을 낮춘 이상,국회도 이번에만은 신속히 호응해 우리 기업의 EU시장 선점에 발목을 잡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안세영 < 서강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