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수도 프라하의 구(舊)시가지 광장.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쌀쌀한 날씨였지만 광장은 붐볐다. 광장 주변에 프라하의 명물인 천문시계탑과 틴성당,성미쿨라셰성당,골즈킨스키궁전 등 문화유산이 즐비한 데다 카페와 레스토랑,상점 등이 몰려 있어서다.

체코의 대표적 명소인 이 광장의 주인은 광장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1369~1415)다. 후스는 34세에 프라하대 총장을 지낸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시류에 편승하면 안락한 삶이 보장된 터였지만 그는 거부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는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1324~1384)의 영향이 컸다.

◆"100년 후 백조가 온다" 후스 예언

위클리프는 사제들이 독점했던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교황의 권위를 부정했다. 또한 교황의 세속적 권한을 비판하며 '거만하고 세속적인 로마의 사제''적그리스도'라고 선언했다.

후스는 이런 위클리프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사제로 있던 프라하 시내 베들레헴성당에선 라틴어 대신 모국어로 예배를 드렸다. 또한 "면죄부 판매는 사기"라며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교황은 후스가 쓴 책들을 불태우고 그를 출교시켰다. 파문장을 받고도 계속 설교하던 후스는 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회의에 소환됐다. 후스는 마침내 사악한 이단으로 정죄돼 화형을 선고받았다. 1415년 7월16일 후스는 콘스탄츠의 화형대에 섰다. 장작더미에 불이 타오르자 후스는 이렇게 외쳤다.

"오늘 거위 한 마리는 불태워 죽일 수 있지만 100년 뒤 나타날 백조는 결코 불태우거나 죽이지 못할 것이다. "

'후스'는 보헤미아 말로 '거위'라는 뜻.'백조'는 바로 독일의 마틴 루터다. 루터는 후스가 화형당한 지 102년 만인 1517년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정문에 '95개조 명제'를 붙이면서 종교개혁의 시대를 열었다. 순례단과 동행한 독일 슈발바흐성령교회의 신국일 목사는 "루터의 종교개혁 100년 전 보헤미아에는 이미 종교개혁과 개신교가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먼 하늘을 응시하는 후스의 동상 아래에 그가 마지막까지 강조했던 진리의 외침이 새겨져 있다. "오직 진리를 찾아라.진리를 들어라.진리를 배워라.진리를 사랑하라.진리를 말하라.진리를 지켜라.마지막 순간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사람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보라

후스의 개혁정신은 독일의 루터 외에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1484~1531)에게도 이어졌다. 츠빙글리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당시 로마교회의 권력 남용과 비성경적 요소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취리히 구시가지의 그로스뮌스터교회와 리마트 강 건너 프라우뮌스터교회는 그가 시무하며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현장이다. 교회 내부는 개혁의 현장답게 별다른 장식이 없이 단출하다.

리마트 강에 놓인 뮌스터다리 옆 바서키르케(물교회) 앞에는 칼을 찬 츠빙글리의 동상이 서 있다.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진영과의 전쟁인 카펠전투에 1500명의 병사들과 함께 나섰다가 전사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개혁은 계속됐고 그의 개혁정신은 사위인 하인리히 불링거를 거쳐 장 칼뱅(1509~1564)으로 이어져 꽃을 피웠다.

◆장로교 초석 놓은 칼뱅

칼뱅을 찾아 제네바로 이동한다. 칼뱅은 프랑스 출신이다.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1533년 교회의 본래적 순결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종교적 사명,즉 카리스마를 경험한 뒤 가톨릭과 결별했다. 이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스위스 바젤로 간 그는 불과 스물일곱 나이에 기념비적 저작인 《기독교 강요》를 쓴 천재였다.

개혁적 종교인인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간 그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네바는 이미 종교개혁이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지만 개혁교회라도 늘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설파했던 것이다.

칼뱅은 시민들에게 엄격한 신앙생활과 실천을 요구하며 오늘날 장로교단의 기초를 쌓았다. 그가 도입한 목사 · 교사(박사) · 장로 · 집사의 4개 직분은 성직자의 독단적 운영에서 벗어나 교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제네바 구시가지의 성 피에르 교회는 칼뱅이 교회개혁을 이끌었던 현장이다. 교회에서 5분쯤 걸어가면 바스티용 공원 벽에 칼뱅과 파렐,칼뱅의 후계자인 베자,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뿌리 내린 낙스 등 4명의 모습을 새긴 거대한 부조상이 있다.

거대한 벽에 새겨진 종교개혁 당시의 슬로건이 칼뱅의 외침을 그대로 전한다. 'Post Tenebras Lux.(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

제네바=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