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프로부터 루터와 칼뱅에 이르기까지 숱한 희생 끝에 이뤄진 종교개혁의 여진은 컸다. 칼뱅의 종교개혁은 프랑스에서 위그노운동을 일으켜 칼뱅주의 신조를 채택하게 했고,네덜란드에서도 칼뱅의 신앙고백이 받아들여졌다. 특히 칼뱅의 '39개 신조'를 채택한 영국에서는 16~17세기에 성경중심의 신앙생활과 실천운동인 청교도운동으로 이어져 칼뱅주의에 투철한 개혁을 지향했다. 또한 청교도혁명은 근대사회 형성에 크게 기여했고,이들이 가진 도덕적 인간과 도덕적 사회의 이상은 아메리카대륙으로 번졌다.

구한말 한반도로 건너온 수많은 선교사들도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교단에 관계 없이 청교도 정신의 바탕 위에 설립됐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최대 교단이 장로교라는 점에서 칼뱅의 신학체계는 우리 개신교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칼뱅주의는 그의 제자이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인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로 다듬어진 뒤 미국 등으로 확산됐고,한반도에 전해졌다.

1054년 동 · 서교회로 분열된 이후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서방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신 · 구교로 나뉘었다. 신교는 루터와 칼뱅주의파로 나뉘었고,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인 영국국교회(성공회)까지 가세해 이른바 '종파주의 시대'를 열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가 지휘하는 독일 군대가 로마 교황청을 침략해 약탈한 사건은 가톨릭에 대한 경고과 개혁의 요구로 받아들여졌다. 이로 인해 가톨릭 개혁을 위한 트리엔트공의회가 1545년 시작돼 프로테스탄트들이 제기한 물음에 답하고,가톨릭의 교리와 법령을 새로 다듬었다. 가톨릭은 또한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요구에 적극 응답했다.

이에 비해 개혁교회주의를 지향하는 개신교는 그동안 성장에만 치중한 채 개혁 노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지금 국내 개신교가 가톨릭에 비해 훨씬 많은 개혁 요구에 봉착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개혁교회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칼뱅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