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함께] 무분별한 상표권 입도선매…고객과 通하는 브랜드 등장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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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만 하고 사용 안해
중소기업 출원 원천봉쇄
중소기업 출원 원천봉쇄
얼마 전 한 중소기업의 이 모 사장은 자사 상품의 시장 반응이 좋아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자사 브랜드를 특허청에 상표출원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유사 상표로 누군가 먼저 등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씨의 상표등록을 막은 유사상표는 시장에서 사용되지도 않았고,권리자도 사업을 접은 상태였다. 결국 이씨는 상표등록을 포기했다.
이 같은 사례는 국내 상표제도의 결함 때문에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상표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상표와 상표가 사용될 상품을 지정해야 한다. 하지만 현행 상표제도는 상품 한 개를 지정한 상표나 수천 개를 지정한 상표에 같은 수수료(5만6000원)를 부과하면서 상표브로커들이 암약할 여지를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상표가 실제로 사용되었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출원 상표가 법정요건만 충족하면 상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의 우리나라 상표제도가 등록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표 출원인들은 이왕이면 많은 상품을 지정해 자신의 권리범위를 넓히려고 한다. 이러한 성향은 상표출원 시 지정상품 수에 대한 통계를 살펴보면 명확하게 나타난다.
2002년에는 1개 상표당 평균지정상품 개수가 9.6개였는데 2009년에는 105개로 그 증가율이 무려 971%에 달했다.
이렇게 지정된 상품이나 서비스가 시장에서 제대로 사용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남용된 상표등록 및 지정은 타인의 권리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시장을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브랜드는 소비자들이 특정 회사의 상품을 선택하는 기준이다. 선택의 기준이 되기 위해 상표는 끊임없이 소비자들에게 다가서야만 한다. 고객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브랜드(상표)는 가치를 높여간다는 얘기다.
반면 시장에서 사용되지 않으면서 권리로서만 선점된 '불통 브랜드'는 타인이 사용하려는 상표 취득 기회를 제한해 상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은 물론 소비자들의 합리적 선택기회를 봉쇄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시장에서 사용되지 않는 상표가 초래할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먹통 상표는 소비자에게 상품 선택의 정보를 제공하거나 품질을 높이는 등 상표의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상표는 국가가 권리로서 보호할 만한 명분이 없다.
둘째 권리로서만 등록된 상표는 타인의 권리 취득 및 사용을 제한하는 방어막으로 이용돼 상표의 공정한 이용을 막는다.
셋째 과다지정된 상표는 심사에 소요되는 시간을 지체시켜 경제주체들이 제때 상표를 등록받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무엇보다 수익자 부담원칙에 입각해 권리범위가 넓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하게 하는 공정한 규정이 필요하다. 또 미국 일본 등이 시행하고 있는 사용의사확인제도(사용의사가 분명한 상품 · 상표만을 등록시키는 제도)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시장에서 사용되지 않는 상표를 취소할 수 있는 불사용 취소 심판제도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먹통브랜드가 소비자와 소통하려는 브랜드를 막고 있는 상황에서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출현을 기대하기 힘들다. 고객들과 호흡하고 소통하는 브랜드만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정부가 상표관련 법 및 제도적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