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 큰 작품일수록 음악이 너무 돋보이면 안 돼요.오케스트라 지휘하듯 강약 조절을 잘 해야 하거든요.있는 듯 없는 듯 관객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쉬리’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태극기 휘날리며’ 등 지난 17년간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음악을 도맡아 만들어온 이동준 음악감독(44·사진).작품 스케일만 보면 우락부락하고 덩치 큰 남자가 떠오르지만 14일 서울 청담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어린 아이같았다.작업실 곳곳에서 키 큰 나무와 잘 가꾼 화초들도 눈에 띄었고, 서둘러 핀 자스민이 은은한 향을 풍겼다.

영화음악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91년 무용 공연 ‘황조가’로 대한민국무용제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음악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이후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를 통해 한국 전통음악과 블록버스터를 접목하며 대작 영화의 단골 음악감독으로 활약해왔다.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아이리스’‘아테나’와 ‘난타’‘점프’‘바람의 나라’ 등 공연 무대까지 그의 손을 거친 작품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올해만 해도 장동건,판빙빙,오다기리 조 등 한·중·일 3개국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마이 웨이’와 창작 뮤지컬 ‘춘앵전’의 음악 작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무대에서 출발했으니 가능했어요.가장 순수하고도 어려운 무용 공연의 음악을 만든 뒤라 다른 장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죠.”

그의 음악은 80~100명의 오케스트라가 등장해 웅장하게 진행되다가 섬세하고 여린 선율로 감정선을 자극하기도 한다.때론 강렬한 탱고 리듬으로 관객의 귀를 매혹한다.

그는 한국 영화음악의 변곡점을 함께한 주인공이다.한국 영화음악은 1990년대 이전과 이후로 대별된다.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외국 음악을 저작권 개념 없이 영화음악으로 사용하던 게 관행이었다.1990년대 초반 ‘쉬리’를 시작으로 영화 열풍이 불면서 전문적인 영화음악 작곡가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영화에 오리지널 스코어(창작곡)의 개념이 도입된 것이 이때였다.

“후반 작업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기면서 ‘음악감독’이라는 이름도 생겨났어요.17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열악해요.”

영화음악은 편집된 영상을 보며 보통 8주에 걸쳐 작업을 한다.35곡에서 많게는 50곡까지 만든다.드라마는 또 다르다.1~2부 정도의 하이라이트 영상과 대본만으로 마지막회까지 감안해 곡을 만든다.뮤지컬도 마찬가지.상상력을 발휘해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부터 필립 K.딕, 아이작 아시모프의 전집을 단숨에 읽곤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힘이 된 것 같아요.‘마이너리티 리포트’‘토탈 리콜’처럼 그들의 작품이 아직도 매년 한 편 꼴로 영화화되고 있잖아요.”

그의 말을 듣고 작업실을 둘러보니 작곡가의 공간이라기보다 작가의 공간을 연상시킨다.역사 소설과 인문학,철학 서적이 여기 저기 쌓여있다.

그는 최근 17년간 미뤄왔던 일을 하나 해냈다.자신의 음악 11곡을 골라 지난달 첫 앨범 ‘피아노 몽타주’를 내놓은 것.오케스트라 연주를 피아노 솔로곡으로 편곡했고, 이탈리아에서 더 유명한 클래식 피아니스트 박종훈 씨가 연주를 맡았다.오는 18일 서울 청담동 ‘드빌 화수목’에서 첫 콘서트도 여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감독보단 작곡가로,작곡가보단 아티스트로 남고 싶어요. 내 이름으로 앨범 내기까지 20년이 걸렸네요.올해 안에 두번째 앨범 낼거에요.”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