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새벽 1시40분 도쿄 외환시장.80.80엔 근처에서 움직이던 엔 · 달러 환율이 80.50엔대까지 곤두박질쳤다. 미국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갑자기 치솟은 것이다.

"이러다간 엔화가치가 1995년 고베 대지진 직후 기록한 사상 최고치(79.75엔)를 깨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도쿄 외환딜러들 사이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불과 10분 뒤 엔 · 달러 환율은 81.15엔까지 급상승(엔화가치는 하락)했다. 일본 재무성과 일본은행(일본 중앙은행 · BOJ)이 시장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일본이 대지진 재앙 극복이라는 전쟁을 치르면서 동시에 엔화가치 급등을 막는 또 다른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엔화가치가 치솟아 수출경기가 곤두박질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80엔이 마지노선"

최악의 대지진 이후 일본 외환당국의 개입으로 엔 · 달러 환율이 요동친 것은 이날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5일도 같은 양상이 벌어졌다. 오전 11시53분께 81.60엔대에서 움직이던 엔 · 달러 환율이 순식간에 81.20엔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2분 뒤엔 다시 82엔대로 올라섰다.

미국 뉴욕멜론은행에서 외환시장을 담당하는 마이클 울포크 애널리스트는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이 엔 · 달러 환율 80엔을 마지노선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 수준이 위협받으면 개입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엔화 방출도 엔고 저지 일환

일본은행이 지난 14일부터 투입하고 있는 긴급 유동성 자금도 엔고(高) 저지효과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은행은 14일 15조엔,15일 8조엔,16일 5조엔을 시장에 방출했다. 일본 시중은행으로부터 RP(환매조건부채권)를 사들이면서 현찰을 내주는 방식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일본은행이 결국 본원통화를 늘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행은 또 자산매입 프로그램 규모도 5조엔 늘렸다. 이날까지 일본은행이 투입했거나 준비 중인 자금만 33조엔에 이른다. 원화로 462조원,달러로 4000억달러를 웃돈다. 4000억달러는 미국이 지난해 11월부터 진행 중인 2차 양적완화(중앙은행이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푸는 것) 규모 6000억달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마쓰후지 도모가즈 SBI리퀴디티마켓 외환 딜러는 "일본은행은 엔화 환율 방어를 위해 양적완화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코메르츠은행도 "일본은행은 대지진으로 인해 엔화가치가 급등하고 이로 인해 수출이 위축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앞으로 이 같은 완화조치가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은행 역시 유동성 공급을 언제든지 추가로 하겠다는 방침이다.

◆엔 캐리 청산 줄어들 듯

대지진 직후엔 일본 당국과 기업이 복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자산을 대거 처분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일본은행은 외환보유액으로 1조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 투자펀드들이 갖고 있는 해외채권도 1966억달러에 이른다. 로이터에 따르면 일본의 해외 투자펀드가 갖고 있는 해외채권은 국가별로 호주 314억달러,브라질 209억달러,캐나다 114억달러,독일 106억달러 등이다.

하지만 엔 · 달러 환율이 지난 11일 83엔대까지 올랐다가 최근 가파르게 떨어져 일본의 해외자산 매각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평가다. 일본이 해외자산을 처분하면 달러 약세-엔화 강세를 불러와 일본의 지진 극복 노력의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박종연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 정부는 재건자금 조달 방식으로 해외자산 매각보다 국채 발행을 선호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일본은행이 떠 안으면 자연스럽게 엔화 약세를 유도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이 같은 분석이 확산되면서 일본 금리는 오름세로 돌아섰다. 지난 10일 연 1.3180%에서 지진 발생 당일인 11일 연 1.3009%,14일 연 1.2164%로 급락했던 10년 만기 일본 국채 금리는 일본 정부의 국채 발행 확대 가능성으로 15일 연 1.2260%,16일 연 1.2332%로 반등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