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대재앙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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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11월1일 포르투갈 리스본.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에 20만여명의 시민들이 크고 작은 성당에 모여들었다. 모든 성인(聖人)을 추모하는 만성절이었다. 오전 9시40분께 성당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1분 간격으로 세 차례나 지축을 흔든 강진은 리스본의 대부분 건물을 무너뜨렸다. 해안에선 높이 15m의 거대한 해일이 항만을 집어삼켰다. 식민지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과 노예무역으로 유럽 최고의 도시를 구가하던 리스본은 순식간에 폐허가 됐다. 25만명의 인구 중 최대 1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됐다.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파를 몰고 왔다. "신이여,진정 저희를 버리시나이까"라는 탄식과 신음이 거리를 지배했다. '신이 주관하는 자연의 섭리는 항상 최선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신정론(神政論)에 사로잡혀 있던 유럽인들로서는 믿기지 않는 대재앙이었다. 하필이면 대축일에,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는 무참하게 와해되고 전복됐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소설 '캉디드(1759년)'를 통해 당시의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것이 신이 창조한,모든 가능한 세상 중 최선의 세상이라면 다른 세상은 대체 어떤 모습이란 말인가?"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끝없는 죽음과 통곡하는 유가족들….모든 것이 지금 일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원전 폭발과 방사선 누출로 이어지는 대피행렬도 '저주받은' 리스본을 떠나던 사람들과 오버랩된다. "대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던 당시 성직자들의 입장도 한국의 어느 노회한 목회자의 해석과 일치한다.
하지만 리스본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았다. 국왕과 정부는 도시를 재건하기로 마음먹었다. 6개월 동안 250차례의 여진이 발생하는 와중에도 "대지진은 신의 진노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라며 떠나는 시민들을 설득했다. 정치적으로는 신정론을 옹호하는 귀족,성직자들의 부정부패를 일소했다. 그렇게 리스본은 유럽 도시 근대화의 모델로 재탄생했다.
문명세계는 결코 공포에 질식당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의지로 공포를 컨트롤하며 다시 일어선다. 사람들 간의 협력은 긴밀해지고 세상을 보는 시야는 더욱 넓어진다. 구도시 리스본의 붕괴는 신정론의 퇴조,교권의 몰락을 앞당긴 계기가 됐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볼테르와 루소가 앞장서고 칸트가 뒤를 받치면서 근대적 세계관은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재난은 신의 심판이 아니라 합리성과 이성을 기초로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지질학 천문학 등 과학에 대한 탐구욕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재앙은 극복하는 순간 다음 세대에 이롭게 작용한다. 중세 창궐했던 흑사병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 창조적 인간성의 재발견을 기치로 내건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수백만명의 군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패혈증은 페니실린이라는 묘약 개발로 이어졌다.
이제 일본은 어떻게 일어설 것인가. 거시적으로 국가보위시스템을 재정비하고 미시적으로는 산업인프라 구축전략을 새로 손질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젊은이들은 해양과 지각 변동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연구할 것이다. 대재앙 이후 나타날 일본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유럽 근대화를 촉발시켰던 리스본 파괴만큼이나 강력한 변화를 몰고올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미래와도 맞닿아 있다.
조일훈 산업부 차장 jih@hankyung.com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파를 몰고 왔다. "신이여,진정 저희를 버리시나이까"라는 탄식과 신음이 거리를 지배했다. '신이 주관하는 자연의 섭리는 항상 최선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신정론(神政論)에 사로잡혀 있던 유럽인들로서는 믿기지 않는 대재앙이었다. 하필이면 대축일에,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는 무참하게 와해되고 전복됐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소설 '캉디드(1759년)'를 통해 당시의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것이 신이 창조한,모든 가능한 세상 중 최선의 세상이라면 다른 세상은 대체 어떤 모습이란 말인가?"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끝없는 죽음과 통곡하는 유가족들….모든 것이 지금 일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원전 폭발과 방사선 누출로 이어지는 대피행렬도 '저주받은' 리스본을 떠나던 사람들과 오버랩된다. "대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던 당시 성직자들의 입장도 한국의 어느 노회한 목회자의 해석과 일치한다.
하지만 리스본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았다. 국왕과 정부는 도시를 재건하기로 마음먹었다. 6개월 동안 250차례의 여진이 발생하는 와중에도 "대지진은 신의 진노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라며 떠나는 시민들을 설득했다. 정치적으로는 신정론을 옹호하는 귀족,성직자들의 부정부패를 일소했다. 그렇게 리스본은 유럽 도시 근대화의 모델로 재탄생했다.
문명세계는 결코 공포에 질식당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의지로 공포를 컨트롤하며 다시 일어선다. 사람들 간의 협력은 긴밀해지고 세상을 보는 시야는 더욱 넓어진다. 구도시 리스본의 붕괴는 신정론의 퇴조,교권의 몰락을 앞당긴 계기가 됐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볼테르와 루소가 앞장서고 칸트가 뒤를 받치면서 근대적 세계관은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재난은 신의 심판이 아니라 합리성과 이성을 기초로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지질학 천문학 등 과학에 대한 탐구욕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재앙은 극복하는 순간 다음 세대에 이롭게 작용한다. 중세 창궐했던 흑사병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 창조적 인간성의 재발견을 기치로 내건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수백만명의 군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패혈증은 페니실린이라는 묘약 개발로 이어졌다.
이제 일본은 어떻게 일어설 것인가. 거시적으로 국가보위시스템을 재정비하고 미시적으로는 산업인프라 구축전략을 새로 손질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젊은이들은 해양과 지각 변동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연구할 것이다. 대재앙 이후 나타날 일본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유럽 근대화를 촉발시켰던 리스본 파괴만큼이나 강력한 변화를 몰고올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미래와도 맞닿아 있다.
조일훈 산업부 차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