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老松 '달빛 소나타' 목탄으로 잡아냈죠"
"한겨울 밤 달빛을 벗삼아 산길을 걸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환한 달빛 아래 어머님이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모습도 생생하고요. 달빛은 어둠과 밝음을 극대화시킨 흑백으로 사물을 비추지요. "

서울 통의동 아트싸이드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이재삼 씨(51)는 "달빛을 흑백톤으로 묘사하는 데 목탄만큼 좋은 재료는 없는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목탄 회화 장르를 개척한 이씨는 그동안 달빛에 천착하며 목탄으로 대나무,매화,소나무를 그려왔다. 199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작가전',1999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국작가특별전' 등에 목탄 회화를 출품해 찬사를 받았다. 지난해 5월에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대나무' 시리즈가 1억2000만원에 팔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목탄을 재료로 달빛을 그리는 데 몰입하는 이유는 뭘까.

"육신이 타 사리를 남기듯이 목탄은 '나무의 사리'라 할 수 있죠.흑백의 극치로서 목탄은 단순한 재료이기 이전에 저에게는 달빛을 감지하는 안테나 역할을 합니다. 달빛은 한국사람만의 문화적 유전자를 함축하고 있는 빛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목탄은 나무를 태운 사리지만 나무나 꽃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영혼의 표현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는 목탄을 캔버스에 칠하고 접착제로 안정화시키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며 대상을 그려 나간다. 천 위에 목탄을 집적시키는 작업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의 지문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문지르는 중노동이다.

최소한 2~3개월 걸려 완성된 그의 흑백 소나무 그림은 달빛에 흠뻑 젖어 있다. 영양의 만지송을 비롯해 합천 화양리의 소나무,지리산 천년송 등 수령 500년 이상의 소나무들이 달빛을 머금은 채 '천기'를 뿜어내는 듯하다.

"한국사람의 노래가 '아리랑'이면 나무는 곧 소나무라고 생각에서 전국의 유명 소나무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어린시절 고향 영월의 단종릉에서 본 소나무가 가슴 한 켠에서 숙성되고 있었는지도 모르죠.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굳이 꼽으라면 영양의 '만지송'입니다. 가지가 많아 영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아요. "

그는 소나무 자체가 아니라 그 고유한 형상의 바깥이 만들어내는 빈 공간에 주목한다고 했다.

"소나무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면 빈 공간이 곧 '달'입니다.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면 달의 빛과 소리,음혈 같은 게 느껴져요. 소나무에 꿈이 내려앉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처음에는 화면에 달을 그려 넣었지만 최근에는 달을 빼고 그 빛만 그립니다. "

전국을 돌며 300~500년 된 소나무 스케치를 할 때 신비로운 경험도 했다고 한다.

"땅거미가 질 무렵 산에 도착해 밤 늦게 찾은 소나무 앞에서 잠깐씩 이야기를 나눈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대개 소나무를 그리러 왔느냐고 묻거나 이처럼 잘 생긴 소나무는 없을 거라는 말을 던지곤 했죠.다시 뭘 여쭙고자 할 땐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귀신에 홀린 듯 무섭더군요. "

그는 "예술가이기보다 장인이 사라진 시대의 '예술 장인'으로 남고 싶다"며 "그림은 수도자의 수행 과정과 같아 직장인처럼 과천 작업실에 오전 8시 출근했다가 오후 6시에 퇴근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목탄으로 소나무를 묘사한 3~10m 대작 등 25점을 내놨다. 다음달 3일까지. (02)725-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