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나온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여 감흥 없이 지내온 회사 생활 5년.대형 식품회사 A사 마케팅팀의 박 모 과장(여 · 32)은 올해 초 모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쭉 떨어지는 감색 슈트에 명품 넥타이를 맨 '훈남'들이 출현하면서 칙칙했던 사무실이 환해졌다.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유명 컨설팅펌의 컨설턴트들.스마트한 외모에 세련된 언변,명쾌한 논리력까지 갖춘 그들이 마냥 멋져 보였다. 하지만 박 과장의 '짝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업무 프로세스를 파악한다며 박 과장과 동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그들은 결국 마케팅팀의 업무 효율성이 가장 떨어진다고 경영진에 보고했단다. "고작 며칠 동안 성가시게 굴더니 우리 팀이 일을 제일 못한다고?"

경영컨설팅 산업이 한국에 본격 상륙한 지 20여년이 지났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늘 불안한 경영진들은 '남들은 무슨 얘기를 하나' 궁금해 이런저런 컨설팅을 받아보지만 '김 과장 이 대리'들에게 컨설턴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공자왈 맹자왈 뻔한 얘기를 듣는데 수억원씩 돈을 쓰다니,차라리 그 돈을 나를 주면 정말 열심히 일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건지"

자동차 업체 B사의 이 모 과장은 요즘 매일밤 야근을 한다. 외부 컨설턴트와 함께 중동 · 아프리카 시장 진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문제는 담당 컨설턴트가 시장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론만 강조하는 컨설턴트와 언쟁을 벌이느라 진이 다 빠진 이 과장.그래도 밤 늦게까지 고생하는 컨설턴트가 안쓰러워 음료수까지 사다줬는데….퇴근 후 휑하니 모범택시를 불러 귀가하는 모습을 보면 맥이 탁 풀린다. 점심도 이 과장은 늘 구내식당,컨설턴트는 회사 지하 고급 레스토랑이다.

전자부품 제조업체 C사 기획실의 김 모 과장은 한 컨설팅펌과 함께 수익률 향상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이왕 프로젝트를 할 거면 좋은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 김 과장.회사 내부 자료는 물론 수익성 향상과 관련한 각종 연구 자료도 기꺼이 찾아줬다. 그리고 최종 프레젠테이션 날.김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장탄식을 내뱉었다. 컨설턴트들에게 기초 참조용으로 준 자료들이 파워포인트로 그럴 듯하게 편집돼 핵심 발표 내용이 된 걸 알고서다. 게다가 자료에 'CONFIDENTIAL'이라고 써놓고 비밀준수까지 요구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컨설팅은 구조조정의 전주곡?

김 과장이 느낀 '배신감'은 이뿐이 아니다. 그는 이후 비서실을 오가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컨설팅의 진짜 목적은 수익률 향상이 아니라 인력 구조조정이라는 것.김 과장은 졸지에 구조조정의 '공범'으로 몰려 동료들의 원성까지 듣게 됐다. "경영진들이 직접 직원들을 해고하기 어려워 제 3자인 컨설팅 회사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때 알게 됐어요.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해결하는 거지요. "

반면 컨설팅 회사의 인력 구조조정 제안을 오너가 일언지하에 거절한 '미담'도 있다. 대형 금속업체 L사는 2년 전 중장기 발전전략 수립을 위해 유명 컨설팅업체에 컨설팅을 의뢰했다. 이후 돌아온 해답은 사업 및 인력 구조조정이었다. 이에 L사 회장은 "우리 회사는 눈 앞의 매출보다 사람을 더 중시한다"며 컨설팅펌의 제안을 일축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직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사기충천된 직원들의 헌신까지 더해져 지난해 이 회사 매출은 30%나 성장했다.

◆"왜 경영진은 그들에게 현혹되나"

대형 화장품 업체에 다니는 김 모 차장은 미국에서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한 엘리트 사원이다. 이 회사 전략기획실에서 신사업 발굴 업무를 맡은 지 2년.그동안 스파 사업에서 병원 사업까지 검토해보지 않은 사업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보고서를 내놔도 사장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그러던 어느날 컨설팅 회사에 신사업 발굴 프로젝트를 맡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 차장은 초조해졌다. 세계적인 컨설팅펌이니 자신이 생각지 못한 획기적인 아이템을 내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3달 뒤 컨설턴트들의 발표는 자신이 1년 전 제출했던 보고서와 놀랄 정도로 비슷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사장의 반응이었다. 자신의 보고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 컨설턴트들의 발표엔 '잘 짜여진 사업계획'이라며 박수까지 치는 게 아닌가. "자네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느냐"는 사장의 '확인사살'에 부글부글 속이 끓는 김 차장.그는 요즘 자신의 능력을 알아줄 새 직장을 찾는 중이다.

여러 차례 컨설팅 프로젝트를 경험했다는 S 전자업체 유 모 과장은 "경영진들이 컨설턴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경천동지할 아이디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논리력과 발표 능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숫자와 그림으로 명쾌하게,영어까지 섞어가며 설명하니 '어르신들' 눈에 좋아 보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컨설턴트"우리도 힘들다"

김 과장 이 대리의 원성을 사는 컨설턴트들도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들도 할말이 없겠는가. 컨설턴트들이 겪는 가장 큰 애로는 고객사 직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다. 글로벌 컨설팅펌의 한 컨설턴트는 "컨설팅 프로젝트는 대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인데 고객사 직원들은 문제를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을 보인다"며 "'을'의 입장에서 자료를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어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다른 한 컨설턴트는 "고객사 임직원들은 '너희가 우리 회사와 업계에 대해 뭘 아느냐'며 컨설턴트를 무시하지만 정작 그들은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고경영자(CEO)들이 이미 방향을 정해놓고 이에 맞는 컨설팅을 요구하는 경우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한 컨설턴트는 "특히 낙하산으로 공기업 사장이 된 CEO들은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는 방향으로 컨설팅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들의 입맛에 맞추지 않을 수 없어 자괴감이 들 때도 많다"고 털어놨다.

때로는 엄청난 인격적 모독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한 전략 컨설팅 펌의 컨설턴트는 중소기업의 중장기 성장 전략 컨설팅을 수행하던 중,회사 오너가 "이런 뻔한 소리를 듣자고 수억원을 지불했는지 아냐"며 자신을 향해 재떨이를 던진 경험도 있다고 한다. 그는 "컨설턴트가 때때로 목숨까지 내놔야 하는 직업인 줄은 몰랐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유창재/노경목/조재희/강유현/강경민 기자 yoocool@hankyung.com